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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ri s resume

EP6. 새벽을 지나는 시간

잘 적응할 줄만 알았던 스타트업에서의 5개월

by 보리 Bori

5년간 공간기반의 신사업 기획을 하다 스타트업의 브랜드 마케터로 이직한 지 5개월

묵혀두었던 이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원래의 계획은 ‘대기업 다니다 스타트업 가보니’ 혹은 ‘이 회사가 스마트하게 일하는 방법’ 쯤의 제목으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bori’s resume 시리즈도 이직한 스타트업의 스토리를 계획하며, 이 본론을 아름답게 맞이하고자 그동안 했던 일, 이직의 계기, 마지막 프로젝트를 해치우듯 써 내려갔었다. 하지만 과거만 뜯어먹을 뿐, 좀처럼 새로운 시작을 시작하지 못했다.

예상과 달리 새로운 조직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면서, 자꾸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들춰보고 싶지 않은 나의 두려움을 용기 있게 마주하고자 결론이 없는 글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스타트업 이직 일기


20년 1월

내가 이직을 결정했을 때 친한 선배가 케이크를 선물해주며 처음엔 힘들겠지만 잘할 거라고 힘내라 했다.

대수롭지 않았다. 난 뭐든 금방 배우고 적응력도 빠르니까! 자신 있었다.


20년 2월 7일 - 13년 몸담은 회사 소속 마지막 날

다음 주에 회사에서 만날 거라 예상했던 팀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급한 사정으로 한 달 정도 휴직을 하게 되셨다며 내가 할 일을 안내해주셨다. 면접 때 미리 내 이력서를 꼼꼼하게 읽으신듯했고 부드럽지만 아주 날카로운 질문들을 해주셨던 분. 이직하면서 이분과 일하는 것을 가장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쉽다.


20년 2월 10일 - 첫 출근

'쏘팸 백과사전'이라는 파일을 받았다. 기업 미션부터 이메일 가이드, 업무 툴 설명서, 프린트 연결법, 디자인 요청 가이드, 인사 규정, 휴가 올리는 법 등 회사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한 정보들이 담겨있다. 어떤 것은 구글 스프레드로 어떤 것은 프레젠테이션으로... 억지로 틀을 끼워 맞추려 하지도 않고 내용을 가장 효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형태로 이해하기 쉽게 적혀있다.

삐까뻔쩍한 웰컴 킷 대신 받은 백과사전은 쏘카의 성격을 단편적으로 잘 보여주는 듯하다.


20년 3월 - 이들이 일하는 방식과 내가 하는 일

슬랙과 구닥이라는 업무 툴로 서로 공유하며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why'에 기반하여 목표를 세우고 데이터로 결과까지 분석하는 스마트한 시스템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외부자의 입장에서 회사와 서비스를 파악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객 저니 맵을 파악하고, 소비자 경험을 조사하는 일 그리고 캠페인.

‘드디어 나도 예산이 짜인 마케팅 계획을 수립하고 진행해 보는 건가’ 기대 반 설렘 반으로 TVCF 촬영일을 기다렸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기대했던 캠페인 촬영은 연기되었고, 주로 고객터치포인트의 모든 텍스트를 검수하며 조금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20년 4월 - 희망퇴직

타다 금지법이 통과되면서 매우 암울한 분위기가 시작되었고 같은 지붕 아래 있지만 남 일인 줄만 알았던 vcnc의 희망퇴직은 쏘카로 밀려왔다. 의지할 사람 없이 희망퇴직이라는 깜깜한 터널을 뚫고 나오는 시간 동안 물과 기름처럼 회사와 내가 너무나 선명하게 분리되는 경험을 했다.

사업기획을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충분히 회사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공감하고 빠른 결단력으로 지금 새로운 희망이 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통해 쌓아 왔을 개인과 회사의 연대감과 신뢰가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날아가고, 다시 그 연대감을 형성하는 것은 처음보다 더 어렵겠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기존 회사에 있었다면 동일한 상황이었어도 절대 느끼지 못했을 경험이었다.


20년 4월 말 - 팀장님의 복직

어수선함이 정리되어갈 때쯤 팀장님이 복직했고, 해야 할 일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서비스 마케팅 기획과 6월 실행할 커뮤니케이션 기획을 맡았다.

이직을 결심하며 기대했던 재밌고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고 동시에 잘해 보이고 싶었다. 빠르게 치고 나가야 할 타이트한 일정이었는데, 쓸데없이 자꾸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쪼물거리며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사이 시간만 흘러갔다.


20년 5월 - "보리의 기획은 촘촘하지 않아요"

팀장님의 한마디는 스스로 고민해오던 나의 기획서 작성 능력에 대한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어 주었다.

기획이라는 것을 수행한 지난 4년 동안 일잘러의 기획서를 보면서 내 기획서에 뭔가가 부족하다는 걸 자주 느꼈었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나의 말이 더해지지 않은 채 글로만 보면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촘촘하지 않다'는 말에 순간 깨달았다. 내 기획서는 상대에 대한 고민과 배려가 부족 헸다. 내 머릿속의 생각을 더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표현해야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은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너무 감사했다. 부족한 부분을 깨달을 수 있어서..

그동안 스스로도 내 보고서에 뭔가 아쉬움이 있었는데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부족한지 맥을 잡지 못했었다. 껄끄럽지만 콕 집어 피드백을 준 팀장님께 감사했다.


하지만 이런 부족함은 당연하게도 마음처럼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빨리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만 급해지고 점점 위축되었다.

또한 그동안 호스피탈리티의 바운더리 안에서 뾰족하게 타깃을 잡아 마케팅과 브랜딩을 해오던 나에게 대중을 대상으로 앱 서비스 마케팅을 기획하는 건 새로운 세상이었다. ‘앱 서비스'도 ‘차’라는 영역도 나에겐 처음이라 어려웠다. 그래서 또 위축되었다.


안돼 나 악순환에 빠진 것 같아.


악순환의 원인 들여다 보기


1. 서비스가 복잡하고 어렵다.

OJT를 진행하면서 오래 근무한 사람일수록 우리의 사업은 어렵다고 했었고, 그때는 이들이 참 겸손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 사업을 자세히 알아갈수록 무척이나 이 말이 공감되었다.

앱 서비스이자 모빌리티 산업이면서 동시에 오프라인적 특성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곳의 서비스와 브랜드에 대해 이해하고 기본을 익히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


2. 알아서 뚝딱뚝딱 잘 해내는 척, 혼자 끙끙대고 있었다.

이전 회사에 있으면서 많은 경력직 입사자들을 만났었다. 일하는 것도 바쁜데 찾아보지도 않고 질문을 하면 가끔 짜증이 났었더랬다. 나는 이직하면 최대한 나 스스로 파악하고 질문을 적게 해야지 생각했었다.

더군다나 이 곳에는 잘 작성된 가이드가 있지 않은가. 이런 가이드를 두고 질문을 하는 것은 내 무능력을 인정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구글 드라이브에서 검색되는 많은 자료를 보고, 그 안에 상충되는 내용들은 왜 그럴지 유추해가며.. 혼자 한참을 끙끙댔다.

그리고 과거에 경력직 입사자들에게 귀찮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했던 나를 반성했다 ㅠ.ㅠ


3. 나의 상식이 이들의 상식과 다르다?

충분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견과 자주 다르다는 것을 경험한다. 대다수의 의견과 자꾸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점점 내 판단에 자신이 없어진다. 빨리 이 회사의 기준과 문화에 나를 맞추어야 할 것 같다.


4. 이들의 옷에 나를 구겨 넣고 있다.

보고서, 메일 형식, 단어 하나까지도 이들이 하는 대로 맞추려다 보니, 남의 옷처럼 어색하다. 시답지도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데 또 시간은 왜 그리 오래 걸리는지.. 참 맘에 안 든다.



이래서 그때 선배가 힘내라고 했었구나.. 이런 소중한 경험을 조금이라도 빨리 해보도록 이직 빨리 할걸... 여러 가지 후회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곧 나이 지고 익숙해질 거라는 희망이 점점 스트레스로 바뀌어갈 즈음, 회사차원에서 조직목표의 얼라인을 목적으로 팀장님과의 1:1 면담이 시작되었다.


새벽을 지나는 시간


이곳은 빠르게 시도하고 결과를 보면서 개선해 나가는 스타일이니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보리는 우리 팀원들과 다른 부분의 장점이 있다. 남들처럼 하려 하지 말고 본인이 생각하는 대로 자신 있게 해 보라 등등

토닥토닥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걸 보니 팀장님에게도 나의 위축이 고스란히 느껴졌나 보다.


면담을 통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이후 바쁜 와중에 귀찮을지라도 자꾸 묻고 확인하면서 내가 부족한 부분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언젠가 나도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팀원이기를 바라면서..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 했다. 앞으로 해가 뜨기까지 몇 분이 남았는지 자꾸 초조해하고 있었다. 서서히 동쪽 하늘이 밝아져 오겠지. 이왕이면 해가 뜨는지도 모를 정도로 열심히 달리다가 어느새 훤해진 하늘을 보고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도 그랬듯 통과하는 새벽이 춥고 깜깜했던 만큼 한층 더 성장하는 시간이 될 거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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