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겨우살이 프로젝트 - 첫 번째이자 마지막 작업
공시와 IR을 하던 경영관리실에서 신사업기획 부서로의 커리어 전환은 내가 자서전을 쓴다면 best 3 안에 들만한 대단한 이벤트일 거다. 처음 공간 기반 신사업 기획 시에는 새로운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는 유형과 무형의 것들로 매력 있게 브랜드를 만들어 내는 일이 신나고 재미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루 12시간씩 일했고 그 시간이 힘들지 않았으니.. 부동산/유통/식음/호스피탈리티 등 새로운 업종을 알아가는 것도, 건축/인테리어 등 새로운 분야를 접하는 일도 내가 빠르게 배우고 성장해 가고 있음을 매 순간 느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2년 전부터 울릉도 리조트를 담당하게 되면서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기상 상태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통제 불가능한 컨디션은 매번 경우의 수를 대비하기 위해 두세 배의 경제적이고 시간적인 비용을 수반하게 했고 이는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에게는 너무 소모적이라 생각되었다. 기존 생활 기반을 두고 울릉도로 갈 의지가 있는 호텔 전문가를 찾는 것도 힘들었고, 호텔 경력이 없는 로컬 기반의 분들을 럭셔리 리조트에 어울리는 서비스 인력으로 교육하는 과정도 서로가 너무 힘들었다. 회사를 그만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낼 만큼 개인적으로 친밀하고 이분들이 아니면 리조트를 어떻게 꾸려나갔을까 싶을 정도로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처음에는 서로가 맞춰나가는 과정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들었다. 엑셀이라는 프로그램이 무엇이고, 이 서류를 왜 어떻게 작성하는지부터 식음업장을 운영하기 위해 기본적인 위생교육과 유통기한이 지나면 음식이 멀쩡하더라도 다 폐기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알려드리는 것부터 시작했으니..
기본적으로 사업성이 나오지 않는 사업을 왜 이렇게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 해야 하는지 공감하지 못했고, 결국 이것이 균열의 시작이었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윗사람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서 그대로 해주는 수동적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2년 넘게 매 달 편도 9시간의 울릉도를 왕복하는 일에 지치기도 했고, 자꾸 울릉도 현실을 탓하며 안 될 것이라고 옭아매며 점점 더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겁이 났다.
겨우살이 프로젝트와 함께 리조트 추가 개발을 준비하던 어느 날, 시키는 대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졌다. 회의 후 사수와의 면담 중에 내 사회생활 역사에 처음으로 “그렇다면 저는 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이런 말을 습관적으로 뱉는 사람이 되기 싫은 자존심에 열심히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데, 나는 5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고, 성장 없이 소모적이고 반복적인 하루가 꽤 오래 지속된 것 같았다. 변화와 도전을 즐기는 나는 최근 급속도로 성장해가고 있는 온라인이나 앱 서비스 류의 업종에서 일하고 싶었고, 그 업종에서 일하려면 기획보다는 마케팅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았다. 브랜드 기획과 마케팅의 커리어를 살려 스타트업의 브랜드 마케팅팀에 지원서를 제출했고, 19년 연말 겨우살이 약 3주 전 쏘카 브랜드 마케터에 최종 합격했다. 그렇게 나는 이직을 결심했다.
첫 회사에서 10년을 넘게 일하다가 이제 처음으로 내가 그렇게 꿈꾸던 주체적으로 기획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쌓인 것들이 한순간에 터져버렸고 결정되었다. 그래도 겨우살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기간까지 최선을 다하리라. 그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에 비하면 아주 소박하지만, 나에겐 첫 내 자식 같은 프로젝트이니.. 그리고 같이 열심히 준비했던 친구들에게도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신나서 열심히 하는 프로젝트가 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이직 결정으로 인해 나와 그리고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하던 친구들에게는 큰 변화가 생긴 기간이었지만, 우아한 백조의 몸짓처럼 겨우살이는 무사히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계획했던 날짜가 기상 문제로 변경되었고 이틀 앞당겨지는 바람에 해외 일정이 있었던 두 팀은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 크리에이터, 디자이너, 사진작가, 다큐멘터리 PD, 기획자 등 총 5팀 11인과 스탭 5명의 겨우살이가 시작되었다.
포항여객선 터미널에서 집합한 첫날, 며칠 동안 연이은 결항으로 발이 묶인 많은 인파 속에 섞여 울릉도로 떠나는 배가 출발했다.
새벽부터 기차와 배로 힘든 이동을 경험한 첫날 이들은 리조트와 카페를 구경하고 푹 쉬었다.
저녁에 리조트 야경 사진을 찍으러 사진작가님 커플과 다녀오는 길에 문득 작가님이 바다와 섬을 너무 좋아해서 울릉도가 기대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첫째 날의 소회를 물었더니, 겨울바다의 성난 파도에 호되게 당하고 나니, 다시 오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날씨를 보며 매일의 일정을 하루 전날 정하기로 했다. 두 번째 날은 울릉도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트래킹의 날로 정했다. 성인봉 등반을 갈 수 있을지 스스로 테스트해볼 겸. 다음날부터 예보된 비를 피해 일출/일몰 모두 볼 수 있도록 조금은 빡빡하게 계획했고, 참여하신 분들도 빠짐없이 의욕적으로 전 일정을 함께 했다.
비가 와서 위험할까 봐 걱정하며 출발한 성인봉은 중간쯤 비가 눈으로 변하면서, 영화에서 보던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기분이었다. 정자에서 먹는 컵라면과 주먹밥도 꿀맛이었다. 울릉도의 뷰를 내려다보려 했던 정상에서는 펑펑 쏟아지던 눈 때문에 막상 우리들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설산에서의 시간은 나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 겨우살이를 준비하며 꼭 바랐던 게 눈 쌓인 성인봉을 다녀오는 것이었는데, 이날 꿈을 이뤘다. 소원 성취의 행복감 때문인지 뿌옇게 흩뿌리던 눈 때문인지 몽환적인 기분이 들면서 이 맛에 산악가들이 설산을 가나 보구나 싶었다. 저녁엔 독도 새우를 회로 먹고, 머리는 바삭하게 튀겨먹었다. 내가 울릉도에서 제일 좋아하는 메뉴!
DAY 4.
일어나 리조트 문을 열고 나오니 눈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오늘이구나 고립의 날!
눈 구경도 하고 카페에서 쉬기도 하고 오전 동안 고립의 시간을 보냈다. 몸이 근질거린 몇몇이 다녀오자 한 눈길 나들이에서 우리는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소리치고 뛰어놀았다. 누군가는 눈밭에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겨우 찾아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와! 눈이 펑펑 오는 울릉도도 오늘 실현되었어 :)
아침도 눈이 계속 내렸다. 다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자 했다. 스태프들은 오전에 열심히 눈을 치웠고, 오후가 되어 파란 하늘이 카페에서 쉬던 우리를 밖으로 불렀다. 하얀 눈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도 찍고 찍어주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음날 울릉도는 떠나는 계획이었으나, 떠나는 날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항으로 일정이 하루 추가되었다. 잠시 다음날 일정을 고민하다가, 그냥 리조트에서 쉬는 게 너무 좋다는 말에 또 하루 이렇게 보내자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은 나도 그들과 함께 섞여 술도 마시며 조금은 즐겼다. 마음 한켠에 자유롭게 본인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디지털 노마드, 프리 워커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좋았다. 순례길 스토리를 듣는 것도 좋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누군가의 설렘을 함께하는 순간도 좋았다.
부족한 점이 많았을 텐데 참여하신 분들도 서로 배려하고, 이해해 주셔서 무엇보다 감사했다.
스태프로서 마음 편하게 온전히 즐기지는 못했지만,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출발한 겨우살이여서 그런지, 나에게는 왠지 마지막 여행 같았다. 바쁜 와중에 열심히 준비한 우리 친구들=동료들=동생들을 두고 간다 생각하니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에 그저 행복하지 많은 않은 복잡 미묘한 감정이 교차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누군가 회사를 떠나면서 ‘퇴사할 때 시원하게 복수해 주겠다 다짐했는데 막상 떠날 때가 되니 행복한 기억밖에 남지 않아 너무 신기하다’고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좋고 아름다워 보였다. 내가 떠난다는 게 살짝 아쉬울 정도로..
이렇게 겨우살이는 나의 의지와 취향대로 기획한 나의 첫 프로젝트이자, 10년 넘게 일해온 내 첫 직장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