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카페에 왔는데 굉장히 맘에 든다.
촌스럽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미감이지만 말이야.
한물간 바텐더가 퇴직금을 모아 고향에 내려와 연거 같은 촌스러운 바 같은 분위기에,
그 한물간 바텐더 같이 생긴 배나온 백인 아저씨가 조금 과장되게 크게 틀어놓은 음악을 크게 따라 부른다.
의자는 폐업하는 교회에서 가져온 게 분명한 기다란 교회 의자에, 나무 책상은 얼마나 오래 된건지 가운데가 부풀어서 노트북이 살짝 기울어진다. 그 옆으로 같은 교회에서 갖고 온 것 같은 오래된 피아노도 식물 장식장 대용으로 놓여져 있다.
연결성 없지만 본인의 취향인듯한 자전거와 경비행기 모형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벽에는 웃기게도 내가 좋아하는 로컬작가의 작품이 걸려있는데 여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것도 너무 웃기다. 그림이 너무 키치하잖아.
바이킹들이 맥주마실 때 쓸거 같은 커다란 컵에 한가득 우유를 붓고 에스프레소 원샷을 간신히 낑겨 부은 아이스 라떼는 슈퍼에서 파는 커피우유 맛이 나는데 그것도 아주 연하게 나 헛웃음이 나온다. 오후 4시를 훌쩍 넘긴 커피를 마시지 말아야지 했지만 왠지 모를 주인장의 포스에 압도되어 커피를 시켰는데, 다른 의미로 커피가 괜찮아서(잠을 못잘 정도로 센거같지 않아) 다행이다. 컵이 너무 커 빨대도 어울리지 않아 그냥 휘젓는 용으로만 쓰고 벌컥벌컥 마시게 된다.
더 웃긴건, 손님이 많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곳에서 커피를 사가고, 4개 남짓의 테이블에는 앉아서 수다도 떨고, 나처럼 혼자 와서 이 시끄러운 가운데 맥북을 열성적으로 뚜들기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 곳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랑 같은 이유로 좋아할 거 같다. 이 웃기는 곳이 맘에 드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미감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함. 그러니까 어떤 모습도 괜찮을거 같은 기분. 그리고 그런 기분을 느낄 때 마다 나는 아직도 울컥한다.
외모에 대한 어떤 억압은 아직도 독처럼 온몸에 퍼져있다. 힐링 캠프에 온 것 처럼 캐나다에 온 이후로 열심히 독소를 배출하고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도, 나는 나를 검열한다.
누구보다 다수에 속하고 싶었던 나는 열심히 그 족쇄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발버둥 쳤다. 화장을 하지 않고 나가는 날에는 입술에 색이 없는 것이 신경이 쓰였고, 취향인 옷이 노출이 있을 때는 나의 취향보다는 사회적 시선을 신경 썼다. 이런 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닌다면 무슨일이 있어도 내 잘못인게 될테니까. ‘이런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내가 문제 인거니까. 형광색옷을 위아래로 매치하는 미친짓은 하지 않았고 튀는짓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누군가가 나를 몰래 찍어서 인터넷에 박제 할 테니까.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할 테니까.
외형적 강박이 갑자기 없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압박을 주지 않는 사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수영복을 입기 위해 살을 빼지 않아도 된다. 화장안하고 나타난 얼굴을 보고 피곤해 보인다고 하지 않는다. 아무도 만나자마자 살이 빠진거 같다고 칭찬해주지 않는다. 대부분 본인의 몸무게를 모른다. 그게 대화의 주제에 오르지도 않는다.
한국보다 캐나다가 낫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캐나다에 와서 살아야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외모로 인해 가진 어떤 정신적인 압박과 생각들이 있는 사람들이 여기와서 잠깐이라도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안된다면 적어도 여행을 와서 차근히 사람들을 둘러봤으면 좋겠다. 그냥 그렇지 않는 사회도 존재하고,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