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이유

by 세런 Seren

2018년 9월의 끝자락, 5년 간의 고시생 생활을 마감했다.

최종 합격자 발표 전날, 18시 정각에 합격자에게만 문자가 온다.

전날까지는 합격할 거라고 말씀하시던 부모님이 그날은 혹시 모를 불상사(낙방)에 대비하고자 애써 초조함을 감추시고 말을 아끼셨던 거 같다. 18시가 가까워질 무렵 나는 엄마와 단 둘이 주방에 말없이 앉아 스마트폰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자가 온 순간 '나 합격했어!' 외치며 아빠에게 뛰어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새내기 대학생으로 성년이 된 풋풋함을 만끽하며 1년을 딱 보낸 뒤, 나는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대학생이 아닌 '고시생'으로 살았다. (졸업을 앞둔 막 학기에 합격한 덕분에, 3개월 정도 다시 대학생으로 살았다)

그래서 대학 시절을 떠올리면 교수님의 수업을 들은 기억보다, 신림동 고시촌에 있는 베X타스, 한X법학원에서 3순환을 들은 기억이 먼저 난다. 휴학, 복학 상관없이 나의 일상은 1년의 시험 스케줄(3월 1차 PSAT, 6월 2차 논술시험, 9월 3차 면접)에 맞춰 돌아갔고, 그 덕에 여름 방학에는 2차 과목 스터디, 겨울 방학에는 PSAT 스터디만 했다.


그렇기에 나의 해외여행 경험은 새내기 시절 여름방학에, 함께 재수 생활을 마친 언니와 배낭 메고 3박 4일 정도 일본 도쿄를 다녀온 게 다였다.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설렜지만, 나의 첫 여행은 악몽이었다. 나는 물갈이하고, 더위 먹어서 골골 대고, 같이 간 언니는 일본 모기한테 물려 팔다리가 퉁퉁 부어오르고,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합격하자마자 다음 해 5월 교육생으로 입교하기 전까지 약 7개월 간 원 없이 해외여행하는 걸 목표로 세웠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 마음 편히 장기 여행 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졸업을 3개월 앞둔 막학기에는 주말을 끼고 합격한 동기들과 가까운 일본 오사카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왔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마치자마자 중학생 때부터 인연을 이어 온 영어 선생님과 미국 서부(LA-라스베이거스) 여행을 갔고, 설을 앞두고는 혼자 독일을 2주 정도 다녀왔다. 이후 합격한 언니와 트렁크 하나 끌고 비행기를 타 두 달 꼬박 9개국(체코-헝가리-크로아티아-오스트리아-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영국-미국동부) 여행을 다녔다.


그 결과, 속성으로 여행 경험치를 올리면서 여러 가지 요령도 생기고, 선호와 취향을 찾게 되었다.

예컨대 나는 자연보다 도시가 좋고, 고층 유리 빌딩들로 둘러싸인 현대 도시는 별로고, 몇 백 년 된 옛 건물이 자리를 지키는 유럽의 도시가 좋다. 또한 박물관보다 미술관이 좋고, 인상주의~현대 미술보다 르네상스와 바로크~로코코 미술 작품을 선호한다. 사진은 원경으로 찍어 내가 젓가락처럼 나오고 배경을 많이 담길 원하고, 자유분방하고 '힙'한 분위기는 그리 끌리지 않고, 질서 있고 '노잼'인 분위기에서 더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나의 선호와 취향에 부합하는 곳을 방문할 때면,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격과 함께 내 앞가림,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니 '자식에게만큼은 나보다 좋은 걸 해주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에 응답하는 순간이 온 거 같다.

부모님은 30여 년 전 신혼여행으로 태국을 다녀온 게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다. 비행기 타고 떠나는 여행이 보편화된 시절도 아니었지만, 자식 좀 키워 놓은 40-50대에도 나와 동생의 학업, 취업 뒷바라지에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 같다. 그렇게 살다 보니 두 분 모두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연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부모님 모시고 여행하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023년 여름 엄마와 영국 여행을 시작으로, 2024년 봄 엄마와 이탈리아 여행, 이어서 겨울에는 드디어 완전체(엄마 아빠 동생까지 네 가족)로 독일-오스트리아-체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왔다.

겨울 가족여행 계획을 세울 때 아빠가 여러 번 나에게 '가본 곳 아니냐? 네가 안 가본 곳을 가야지'라는 말씀을 한 게 기억이 난다. 나는 아빠에게 '내가 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곳'이고, '그런 곳에 우리 네 가족이 같이 가면 더 좋을 거 같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녀온 여행은 내 예상보다 더 좋았고 보람 있었다.

특히나 나는 다시 방문하니 익숙하고 반가웠으며, 첫 방문 때 미처 일정이 맞지 않았거나 몰라서 못 해 아쉬웠던 걸 보완하니 금상첨화였다. 다녀와서는 엄마 아빠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여행하며 찍은 인생 사진들로 가득 차고, 가끔 두 분이 스마트폰으로 여행 사진을 찾아보고, 주변에 자랑하는 걸 보면 K-장녀로서 뿌듯했다.


한편, 너무나 좋은 기회로 올해 영국으로 공부하러 가게 되었다. 회사를 벗어나 오랜만에 캠퍼스에서 수업을 듣는 것도 기대되지만, 나의 여행 견문을 넓히고 영어 실력을 높여 하루라도 젊을 때 엄마 아빠 비행기 태워 주고 좋은 구경을 시켜줄 수 있게 되어 더 행복하고 감사하다.


얼마 전 엄마가 2023년 영국과 2024년 이탈리아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 '1년 사이에 더 늙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는 당연한 명제가 엄마 아빠에게는 더 가혹하게 와닿는 거 같다. 그래서 하루라도 더 지나기 전에 '부모님 모시고 여행하기'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싶다. 이런 딸의 마음을 알고 두 분은 2년 넘게 꾸준히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하고 계시는데, 조만간 다녀볼 만큼 다녀 본 부모님이 '좋았던 곳에 다시 가보자'라고 할 날이 오길 기대한다. (이미 엄마는 이탈리아를 다시 가보고 싶다고 하신다!)


끝으로 나처럼 여행 견문을 넓혀, 부모님과 자유여행을 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패키지여행이 아니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동선을 짜고 예약하는 번거로움과 현지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고생한 만큼, 엄마 아빠에게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오래오래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자유여행의 묘미인 소소한 일화, 이벤트는 덤이다. 예컨대 에어빈앤비에서 해먹은 짜파구리와 부대찌개, 현지 슈퍼에서 스테이크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놀란 것, 플릭스(Flix)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거나 기차를 두 번 환승해서 가야 하는 로텐부르크(Rothenburg ob der Tauber)행 기차를 놓칠까 봐 뛰어간 것(작은 시골역이었는데 막상 플랫폼에 가니 기관사 아저씨가 조심히 타란 듯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등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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