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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 Apr 05. 2023

갑질의 선을 넘다.

Gapjil. 도저히 번역할 단어를 찾지 못한 우리말..

육아휴직을 들어온 지 아직 한 달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번주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현장에서 조사하고 있는 연구원의 전화였다.

육아휴직 중에 죄송한데 현장 와서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엥? 무슨 소리야? 전화를 받고 당황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많잖아? 휴직한 사람한테 와달라 했다가 나중에 단장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는 난색을 표했다.

2월부터 시작된 현장조사는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진행이 된 상황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얘길 들어보니..

현장 조사를 개판으로 했다고 단장한테 주기적으로 욕을 먹었나 보다.  단장한테 욕먹는 게 한두 번이냐 했지만 상황이 좋진 않은가 보다 육아휴직 중인 나에게까지 연락한다는 건..

현장에 일주일 중 3~4일을 단장이 현장 가서 같이 조사하는데 조사가 잘못되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지만 또한 내가 겪은 단장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알겠어. 현장 가서 얘기해 보자. 미리 현장 사진 좀 보내줘 봐라 나도 좀 보게..  그러고 전화를 끊었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들어갔어야 할 현장이기도 했다. 단장은 연구원들에게 나를 원망하라고 했다고 한다..ㅠㅜ)


그날 마침 나는 사무실 팀장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통화 얘기를 했더니 팀장 왈 안 그래도 아침에 단장이 불러서 현장 연구원들한테 한소리 했다고 기본도 안되었다를 시작으로 아이들에게 갑질로 신고하라고 얘기하고 내가 너희라면 사직서 제출한다. 등등 훈계(?)했다고 한다. 단장의 막말이 한두 번도 아니고 저런 멘트도 솔직히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지만 들을 때마가 피가 거꾸로 솟아오른다.

 자기 권위를 이용해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없이 이렇게 막말을 퍼부으며 자신의 권한을 무소불위하게 휘두르고 있으니 나 역시 몇 년 전부터 육아휴직 전까지 종종 상황만 되면 당해 왔었다. 안 봐도 뻔한 상황이다.  


팀장은  현장 연구원과 통화를 하는데 그 강한 친구가 목소리가 떨리더니 울컥해 버리는 게 아닌가. 아 상황이 좀 심각하구나를 느꼈고 월요일에 나와 팀장님은 아침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한 우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정녕 이게 내가 알던 아이들의 얼굴인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말을 안 했던 것일까.... 미친 책임감이더냐....


연구원들은 처음 접해 본 조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며 자기들 나름대로 자료도 찾아보면서 최선을 다했으나 돌아오는 건 계속 모욕이었다.  욕을 먹어도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피드백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겠는데 욕만 하고 또 욕만 하고 욕만 하고만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당연히 사무실에서는 매주 단장이 출장을 가고 별 얘기가 없으니 잘 돌아가는 줄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현장 연구원들의 멘탈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모든 조사가 잘못되었으며  더 이상의 생각도 판단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만 먹어도 토하고 숨쉬기까지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심각했다.


어찌 되었든 현장은 봐야 하니 연구원들과 같이 현장을 둘러보니.... 참...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조사이고 실수란 것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조사의 미숙함으로 조사 완료가 되지 않았고 조사 중인 상태이며 실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미숙함만 보였고 내 기준에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허탈했다.  


하지만 현장 연구원들은 우리의 말을 믿질 못하는 눈치이다. 단지 위로의 말로 들리는 듯보였나 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우선 현장의 미흡된 조사를 진행하고 팀장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하나하나 다 설명하며 체크해 주었다.


연구원들이 원하는 건 이런 대화였을 텐데........ 너무 많이 와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 짐승 같던 남자애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 있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다음날도 나는 현장으로 가는 길에 도로변에 익숙한 차와 사람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저 미친놈이란 소리가 나왔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숨이 안 쉬어져 못 가겠어... 손을 좀 떨고 있었다.

연구원 차를 앞장 세우고 나는 내 차로 뒤따라가며 현장까지는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이미 멘탈이 무너진 연구원은 회복이 불가능해 보였다. 어제도 현장에서 팀장님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둘째 날,  연구원들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보였고 조사에 있어서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물며 날씨까지 사진 찍기 딱 좋은 날씨로 하늘도 우릴 도와주는 거 같았다.  이렇게 잘하는 아이들인데..

 

이러는 와중  대단하신 단장은 기본이 안되어 있는 연구원들에 대한 인원 교체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애들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놓고 양심의 가책도 없는 것일까 진짜 저 사람이 사람인가 싶었다. 이 상황에 인원을 교체해 버리면 연구원들에겐 트라우마가 생겨서 영영 현장을 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연구원들에게 필요한 건 잘하고 있다는 응원과 격려, 현장에서 같이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든든한 지원군이다. 이 상황에 연구원 교체 카드를 든 단장은 도대체 그 자리에 왜 앉아 있는 것일까... 누구를 위한 단장이며 책임자인 것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무능한 단장은 왜 맨날 승승장구하는 것일까... 그런데 원래 세상이 그런단다.

저런 놈은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산다고....


이렇게 직장 내 갑질이 성행하는 가운데에서도 우리 사무실 곳곳에는 "직장 내 갑질 근절" 문구가 버젓이 붙여 있으며 의무교육으로 "직장 내 괴롭힘 예방 교육"과 관리자 즉 팀장부터는 추가 예방 교육까지 받고 있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 부질없다.


요즘 뉴스에는 직장 내 갑질로 인한 안타까운 소식을 많이 접하고 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지만 직장 내 갑질에 대한 신고는 결코 쉬운 게 아니다. 특히 우리 같은 연구직은 순환보직이 아니기 때문에 단장 역시 정년까지 같이 간다. 이런 상황이면 갑질 신고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으며 신고를 하더라도 퇴사를 각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치졸한 보복 등 2차 피해까지도 생각해야 한다. 갑질 신고에도 준비와 용기가 필요하다.


저녁 늦게 연구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감사하다고 마무리 잘해보겠다.

부디 이번 상황을 연구원들이 잘 견뎌내고 이겨줬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비난해서 그가 상처를 받았다면 그 상처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위험한 불꽃이다."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테일 카네기, 현대지성.


<사진 출처 : pixabay>

Gapjil. 도저히 번역할 단어를 찾지 못해 우리 말 그대로 보도가 되었다는 단어, 갑질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한 행위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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