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놀이공원에 가면 꼭 한 번씩 타던 회전목마. 그때는 그게 우리네 인생 같다고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그 어렸던 꼬마 아이가 벌써 40대 중반이 되었다고 어른 흉내를 하고 있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다시 한번 보니 회전목마는 단순한 놀이기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우리의 인생이 담겨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희로애락을 느낀다.
꼬마 아이는 줄을 서서 한참이나 기다린다. 뒤에도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지만 앞에도 구불구불하게 사람들이 늘어서 있다. 저렇게 빙빙 돌기만 하는 놀이기구가 과연 재미있을까? 한 방향으로만 도는데 어지럽지는 않을까. 쩝쩝거리며 다른 놀이기구도 휘둥그레 바라본다. 어느새 줄이 점점 짧아진다. 우아, 드디어 자기 차례. 꼬마 아이는 오빠 아빠랑 같이 회전판 위로 뛰어 올라간다. 으아, 어떤 걸 탈까. 왜 이렇게 종류가 많은 거야. 큰 말은 너무 높아서 떨어질까 봐 무섭고 의자같이 생긴 마차는 위아래로 조금밖에 움직이지 않으니 재미가 없을 것 같다. 그럼 그나마 만만한 게 작은 말이다. 작은 말인데도 혼자 올라가기가 무섭다. 아빠의 손을 잡고 힘주어 올라탄다. 오빠는 두 살이나 많아서 내 옆에 있는 큰 말을 탔지만 마찬가지로 아빠가 도와준다. 아빠는 오빠랑 나를 말에 묶어두고는 회전판 밖으로 나가 엄마 옆으로 간다. 아빠가 어디로 가나 두 눈으로 똑똑히 봐 두고 오빠도 한 번 쳐다보면서 얘기한다. 오빠, 무섭지. 히히 근데 재밌겠다. 안내원의 방송이 나오고 곧 서서히 움직인다. 와, 움직인다. 내가 탄 말이 움직이네. 올라갔다 내려갔다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도착할 때 엄마 아빠의 얼굴을 바삐 찾는다. 다행히 엄마 아빠가 아까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서 손을 흔들고 사진도 찍어 준다. 기분이 상쾌하고 오묘하게 싱숭생숭하면서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바깥세상이 휙휙 지나가서 조금 어지럽다. 시선을 거두고 눈을 크게 깜박인 뒤 다른 말들도 관찰해 본다. 말들의 생김새가 다 다른 게 신기하다. 크기도 제각각이다. 공통인 것은 모든 말들과 마차가 봉에 매달려 있다는 거다. 만약 말이 자유롭게 움직인다면 좀 더 재밌을 것 같은데 한 자리에서만 뱅뱅 도는 것이 살짝 무미건조하다. 그래도 안 타는 것보다는 따봉으로 좋다. 회전축의 안쪽에 놓여 있는 마차에도 사람들이 꽉꽉 차 있다. 거기 앉아 있어도 재미있을까? 땅에 붙어서 가면 하늘을 나는 실감이 좀 덜 날 것 같은데. 그래도 그들도 나름 재밌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열 바퀴쯤 돌았을까. 이제 익숙해질 때가 됐는데 안내방송이 나온다. 그만 타라고 한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안전벨트를 푼다. 사실 풀 줄 몰라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안전 요원이 도와줘서 간신히 내린다. 오빠랑 발을 맞춰 출구를 찾아 엄마 아빠를 찾아간다.
회전목마에서 내린 꼬마 아이는 40대 중반이 되어 회전목마를 멀리서 바라본다.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말을 바라본다. 말은 그 자리에 못 박혀 열심히 펌프질을 한다. 펌프질을 하면서 빙빙 돌아가는 하루를 열심히 살아간다. 옆에 있는 동료들, 가족들도 제각각 짐을 싣고 열심히 나아간다. 어떤 날은 축 늘어져 기운이 바닥을 치다가도 어떤 날은 쌩쌩해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운이 샘솟는다. 어떤 날은 짐을 어디론가 내다 버려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가 또 어떤 날은 무겁디 무거운 짐이 실려 다리에 쥐가 난다. 큰 말이 되고도 싶고 말에 이끌리는 마차가 되고도 싶지만 큰 말은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할 듯하여, 마차는 너무 수동적인 듯하여 내 몸에 가장 알맞은 작은 말이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말들과 마차가 어울려 살아간다. 더 큰 말이 되어볼까 욕심을 가져본다. 그만큼 높은 위치에 오르려면 작은 말이었을 때 가졌던 편안함과 안락함을 포기해야 한다. 대신 더 높은 위상을 가질 수 있고 더 높은 위치로 오를수록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 낮으막한 곳에 있는 마차는 더 편해 보이지만 더 흥분되거나 짜릿한 경험을 해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의 내 말이 삶의 딱 평균인 것 같아 더도 덜도 말고 그냥 지금의 말에 만족한다.
회전목마처럼 우리의 인생도 돌고 돈다. 돌고도는 회전목마의 탑승 시간이 끝나기 전에 어떤 걸 이루었는가 돌아본다. 남들과 비교만 하다가 자기 건 하나도 이룬 게 없는가, 성실한 일꾼으로 살아와 한 가지는 너끈히 이루었는가. 아니면 남들은 하나밖에 이루지 못한 어려운 일을 두세 가지쯤 본캐, 부캐로 나누어 감당하고 있는가. 혼자 어려움을 이겨냈는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는가. 어떤 인생이 더 값진 것인가. 뭔가를 많이 이룬 것이 꼭 가치 있는 삶인가.
앞으로 남은 회전목마의 탑승 시간은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 그동안 타 본 경험으로 만족하며 과거만 추억할 것인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 새로운 일을 일구고 싶은가. 끝날 걸 알면서도 더 타고 싶은 생각이 드는가, 더 이상 탈 미련이 없는가. 타고 있는 동안 더 많은 이웃들과 어울리고 싶은가, 누구와 어울리는 그 관계 자체가 괴롭고 힘든가. 누구를 돕고 싶은가, 자기 자신을 돕고 싶은가. 절대적인 신을 의지하고 싶은가, 자기 자신만을 믿고 싶은가. 탑승 시간이 끝나갈 때까지 회전목마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우리는 저마다 평생을 생각하고 평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우리네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꼬마였을 때 우리 손을 꼭 잡고 회전목마를 안전하게 태워주셨고 안전벨트를 매어 주셨으며 봉을 꼭 잡고 떨어지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분들, 우리가 회전목마에서 다치지 않고 즐겁게 잘 타고 있는지를 노심초사 지켜보셨던 두 분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회전목마를 타고 가는 중이다. 우리 부모님은 어떤 목마를 타고 평생을 살아오셨을까. 더 높은 목마를 타보지 못해 속이 쓰리진 않았을까. 나처럼 그래도 딱 중간 말 정도는 타고 살아왔다고 만족하고 계실까. 앞으로 우리는 어떤 목마를 태워드려야 할까. 편안한 마차가 좋지 않을까. 아마 우리도 30년 후쯤에는 갈아타고 싶어 할지도 모를 마차로. 이제는 우리가 두 분의 마차를 지켜봐 드리고 손 흔들어 줄 때이다. 안전하고 즐겁게 타실 수 있도록.
회전목마를 직접 타 보고 많은 것들을 느끼다 보면 나이 40이 넘었을 때 저절로 어떤 진리를 깨닫게 된다.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의 말들은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개성도 각양각색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또 어떤 목마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타느냐에 따라 무지 지루할 수도, 무척 즐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빙빙 돌아서 어지럽긴 하지만 그래도 적응되면 타볼 만한 것, 그게 바로 인생의 회전목마다. 아무리 돌고 돌아도 날마다 새로운 걸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건 우리 각자의 몫일 뿐. 우리의 회전목마는 언제나 돌고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