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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Nov 27. 2024

마음속 깊은 곳까지 깨끗해져라.


마음속 깊은 곳까지 깨끗해져라.


어제부터 알고 있었 흰 눈 소식

하지만 오후일 줄 알았지,

이른 새벽부터 줄이야.


어제나 오늘이나

별 특별한 오전 일정이 없고서는

식구들 다 나갈 때까지

침대에 붙어 있는 나에게

우리 둘째 아들이 등교하며 말한다.

"엄마, 눈이 많이 왔어."


반쯤 열린 귀로 둘째 아들의 목소리를 흘려 담고

뭉그러진 발음으로 내가 대답한다.

"으응~ 그랬~숴? 

  아들, 추우니까 패딩 입고 장갑 끼고 가~."

"괜찮아. 엄마. 눈 오는 날은 더 따뜻한 법이잖아.

  그리고 오늘 지하철 탈 거야."

"어.. 그렇구나. 아들 잘 갔다 와.

 그래도 혹시 눈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장갑이 필요할 텐데.."

"괜찮아. 엄마. 눈싸움은 안 할 거야.

  갔다올게. 엄마. 잘 자."


따뜻한 정서를 지닌 둘째 아들과의 짧은 대화가

소리소문 없이 흩날리는 눈발처럼 그렇게

희미해지고 있었다.


둘째 아들이 나가고 첫째 아들도

나의 침대로 와서 말한다.

"엄마, 눈이 엄청 많이 왔어. 봐봐. 창문 밖에."

"으응~. 그랬구나. 조심해. 미끄러지지 않게."

"엄마, 근데 내가 실수로 쳐서 엄마 칫솔이 변기에 빠졌어."

"그럼 꺼내~"

"손으로? 지금 나 빨리 나가야 되는데?"

"그거 꺼내는 데 몇 분이 걸린다고."

"아, 엄마. 미안. 지금 나가야 돼서."

"그래. 잘 갔다 와. 수업 시간에 집중 잘하고~"


아들들을, 침대에서 누운 채, 눈 감은 채 보내고서

얼마나 더 잤을까. 몸이 개운질 때까지

나는 꿈속을 헤매었다.


10시 반 개운한 기지개를 켠 후,

오늘 오전엔 큰아들 윤사 족보를 출력해 놓기로

했으므로 명상과 스트레칭을 생한다.

윤사 족보문제가 척척 나오는 동안

눈을 들어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와..

이렇게 눈이 쌓였구나..


혼자 늦은 아침을 먹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다시 창문밖을 바라본다.

와~!!

눈이 마구마구 내려온다!!



밖으로 나간다.

나가자마자 감탄이 감탄사로 나온다.

우와!!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경이로운 풍광이란!



1시간 반을 뚫고

지하철을 달린다.

서초 어느 역 개찰구를 나가 지상으로 올라간다.


헉!! 헐!! 와, 대박!!

누가 듣거나 말거나

감탄사를 연발한다.


패딩에 달린 털 달린 큰 모자를 바삐 뒤집어쓴다.

안 그러면 화장이 다 지워지겠거든.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신혼방 훔쳐보듯 조심조심

힐끗힐끗

모자를 들어 바라본다.

굵직굵직 굵어진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쏟아진다.

손이 시렵지만 눈내리는 풍경은 아름답다.


넘어져 있는 자전거도 눈을 이불처럼 덮고 있고

길가에 세워진 오토바이도 동그랗게

소복이 쌓인 눈을 태우고 있다.

귀엽다.

눈송이가 귀엽고

동그랴 눈을 태우고 있는 오토바이가 귀엽고

넘어져서 안타깝지만 눈덮인 자전거가 귀엽다.



교실이다.

패딩 위에 소복이 쌓아 가져온 나는

쌤들과 깔깔거린다.

따뜻한 동료쌤이 내 패딩과

내 가방에 쌓인 소복한 눈을

복도로 도로 나가 털어준다.


수업이 시작됐다.

나의 주이론이 될지도 모를,

지금 나의 내담자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수용전념치료(ACT) 시간이다.

통창 유리창을 경계로 눈발이 거긴 있고,

여긴 없다.

여기 없어 다행이지만,

거기서 펑펑 내려주니 고맙다.

이렇게 나는 눈으로만 눈을 보려하니

조금 이기적이지 않나.


나는 이기적이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눈은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자연은 판단을 하지 않는데

나만 판단을 한다.


판단을 하지 않고

오롯이 존재로서만 존재하는,

그래서 경이로운 자연을,

오늘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 함박눈을

가슴에 품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찹쌀순댓국을 포장한다.

뜨끈하게 한 그릇씩 말아먹자.


집앞에 서있는 나무들이 조명을 받아

또다시 아름답다.

오늘 하루 온종일 난 아름다움 속에서 살았다.

눈송이들이 아름답고

눈을 모자로 쓰고 있는 소나무가 아름답고

대자연의 아름다움알아보는 모든 이들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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