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 자신의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는 삶 VS 한 개인의 인생에 있어 진정한 품위를 지키는 삶
� 수면 위에 드러난 이야기와 그 아래 잠겨있는 진짜 이야기는 다를 수 있다.
� 하루 중 가장 좋은 때가 저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여전히 궁금!
�독서See너지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_한나 아렌트 '악의 평범성'
▶ 리스본행 야간열차, 스토너,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그레이트 뷰티
▶ 남아있는 나날 ost, Still Sunset_넬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가즈오 이시구로는 정말 이 말이 하고 싶었을까?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을.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에 대하여?
황순원의 '소나기'를 우리는 국어시간에 이렇게 배웠다. 순수하고 풋풋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그런데 재밌는 것은 어느 외국인이 이 '소나기'를 읽고 '계급 갈등'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는 것이다. 그 말에 무릎을 쳤다. (물론 실제로 무릎을 쳤다는 건 아니고..ㅎㅎ)
인문학적 읽기란, 모두가 공감하는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투영하는 읽기다. 소설을 읽다 보면 '수면 위에 드러난 이야기와 그 아래 잠겨있는 진짜 이야기는 다를 수 있다'. 작가의 의도일 수도, 독자의 감각일 수도 있다. 그것이 소설의 특권 아닌가.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딱 그 생각이 든다. 위대한 집사에 대한 위대함과 연민, 사랑 그런 이야기. (영화는 그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있는 듯 하다) 그러나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작가가 아니다. 부커상과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작가다. '남아 있는 나날' 동안 잘 지내시오! 라는 메시지를 소설에 담아 독자들을 우아한 문체로 현혹할 작가가 아니다. 그의 전작들이 그렇다. 깊이 숙고한 생각들을 이야기로 풀어가면서도 반전 매력까지 겸비했다. 그러면서도 품위를 유지한다.
Still Sunset_Nell
'프란츠 카프카와 제인 오스틴을 섞은 듯한 작가'라는 평을 듣는 가즈오 이시구로.
이미 영미 문학계에서는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는데, 노벨문학상 수상을 하고서야 그해 작품을 접했다. 부커상 수상작이자 동명 영화의 원작인 <남아 있는 나날>은 일본계 영국 작가가 쓴 지극히 영국적인 소설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오르는 건 위대한 집사의 삶을 강조하는 주인공 스티븐스가 섬기던 인지부조화, 설국의 헛수고, 허무주의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자신의 일을 열심히 했을 뿐, 그것이 어떤 역할인지 생각하지 못한 것)
'위대한' 집사로서의 삶을 꿈꾸고 실천하는 우직한 성품의 스티븐스는 '자신의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느라 가족도 사랑도 세상 이치도... 그 어느 것도 스스로 선택하거나 지키지 못하고 살면서도 헌신하고 순종하는 삶에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온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애썼던 '품위'인 것일까? 집사로서가 아닌, 한 개인의 인생에 있어 진정한 '품위'란...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스토너>에서 받은 깊은 감동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그레이트 뷰티>의 분위기를 살짝 가미한 가즈오 이시구로만의 '품위'있고 애잔한 문체로 가슴을 파고든다.
남아있는 나날 영화 소개
영국의 달링턴가는 모두가 알아주는 유명한 귀족 집안이다. 달링턴 가의 집사 스티븐슨(안소니 홉킨스)은 집사장이라는 신분을 넘어서서 달링턴가의 충복이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달링턴가를 위한 것이 먼저였다. 달링턴가가 최우선인 그는 하녀장 캔튼(엠마 톰슨)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것 역시 한 순간의 감정일 뿐이라고 치부하며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
제 2차 세계대전까지도 외교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달링턴 저택이 달링턴이 나치 지지자로 지목되면서 몰락한다. 어쩔 수 없이 달링턴가는 미국의 정치인 손으로 넘어가지만 스트븐슨은 달링턴가를 지키려 한다. 새 하녀장으로 캔튼을 부르지만 손녀를 키워야 한다며 캔튼이 그의 제의를 거절하자 그제서야 스트븐슨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하는데...
출처_ 다음영화
발췌
그 일화의 어딘가에 진정한 '품위'의 핵심이 담겨 있음을 내 부친은 본능적으로 알고 계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단정하고 싶다.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저명한 가문과의 연계야말로 '위대함'의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명백해지는 것 같다. 자신이 봉사해온 세월을 돌아보며, 나는 위대한 신사에게 내 재능을 바쳤노라고, 그래서 그 신사를 통해 인류에 봉사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위대한' 집사가 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수긍하는 사실이지만, 은 식기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마셜 씨였다. 외부인들이 자세히 관찰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집안의 다른 어떤 물품도 식사 때 등장하는 은 식기를 따라갈 수 없으며, 따라서 은 식기는 어떤 집의 수준을 가늠하는 공식 지표로 기능한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순간에 다르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앉아 있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만 심란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전환점'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스미스 씨는, 사람의 품위가 그런 것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확고한 소신이 있는가 없는가, 뭐 그런 것 말입니다.
내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느라 애써야 했고, 게다가 내 부친도 자랑스러워하셨을 정도로 잘해냈다. 그리고 홀 건너편, 내 시선이 머물고 있는 문 뒤, 방금 막 내 직무를 수행하고 나온 바로 그 방에는 유럽 최고의 실력자들이 우리 대륙의 운명을 논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그때 거기에 서서 그날 저녁의 사건들, 즉 그 시각까지 있었던 일들, 그리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되씹어 보자니,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성취했던 모든 것들의 요약 판인 양 느껴졌다. 그날 밤 나를 고무시켰던 그 승리감을 나로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그리고 이제 뒤는 그만 돌아보고 좀 더 적극적인 시선으로, 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잘 활용해 보라고 한 그의 충고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하긴 그렇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
남아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아이히만은 뜻밖에 평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지난 뒤 유대인 학살 소식이 전세계에 알려졌을 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나 아렌트도 그것이 진실이라고는 믿지 못했지만 결국 그 소식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잡혀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아렌트는 예정되었던 대학의 강의를 취소하고,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이로써 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탄생한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보고를 하면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언급을 하였는데, 이는 어떠한 이론이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또 그에 앞서 있었던 경찰심문에서 보인 그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에서 사람들이 탐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특징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흥미로운,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그는 한때 자기가 의무로 여겼던 것이 이제는 범죄로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이러한 새로운 판단의 규칙을 마치 단지 또 다른 하나의 언어규칙에 불과한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2017. 10. 27 기록 / 2022. 5. 8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