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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ene Jul 19. 2022

사랑이 전부야

일기를 계속 공개적으로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sns의 모든 자랑질을 멈춘 후부터 타인에게 나를, 그것도 나의 내면까지 노출하는 브런치 굳이? 계속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자꾸만 파고들어 고민이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는 있을까. 뭐 그런 진심이기도 하고 합리화 같기도 한 생각 속에서 계속 글을 쓰라는 브런치의 독려 알람에도 모른 척, 게으름과 자유로움을 한껏 누리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은 오랜만에 나의 영원한 숙제 같은 아들 이야기를 좀 볼까 한다.


우주는 가끔 신기한 일을 한다. 내가 무언가 필요할 때 그것을 내 앞에 가져다주는.

요즘은 youtube가 그렇다. 언젠가부터 나의 알고리즘은 현재 나의 상황에 딱 맞는 영상을 띄어주곤 한다. 그로 인해 나에겐 감사한 변화가 찾아왔다.


지능장애와 틱과 강박이 있는 아이. 소심하고 응용력, 융통성이 없고 눈치도 없고 사회성도 부족해서 친구 없는 아이. 그런 내 아이가 캐나다에 왔다고 뭘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불안이 높고 걱정 많고 완벽주의에 조급증의 나 역시 캐나다에 왔다고 뭘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학습이 어려운 아이인데 당연히 영어도 안 되는 상태에서 secondary로 들어갔으니 다급한 마음에 영, 수 과외를 붙였고 나도 옆에 붙어 반복해서 가르쳤다. 결과는 뭐. 늘 그렇듯 유급다. 이 유급이라는 결과가 계속되면 졸업을 못한다는 걱정은 불안한 미래를 끌어오고-그러면 내 아이는 초졸이 되는 것이고-그러면 내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 것인지-나에게서 독립이라는 걸 할 수는 있는 것인지- 나의 사고방식은 대체로 이렇게 부정적으로 흘러간다. 아무리 아이에게 지식을 넣어봐야 입력이 되지 않고 저장이 되지 않으니 지식을 주입하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안 하면 불안하니 할 수밖에 없는 뭐 그런 어리석은 도돌이표 안에서 아이와 나는 십수 년째 뱅뱅 돌고 있었다.


말이 되는 곳에서도 외로웠던 아이인데 말이 안 되는 곳에서는 오죽했을까. 틱과 강박도 새로운 증상들이 추가되며 정신없이 튀겨져 나갔다. 게다가 사춘기까지!! 그렇게 감당 안 되는 아들에게 매달려있는 동안 역시나 '나의 사랑 둘째'는 방치되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감당이 안되니 그제야 나는 '에라, 모르겠다.' 내려놓게 되는데 꼭 그 시점에 우주가 보내는 것인지 신이 보내는 것인지 모르겠는 그 어떤 도움을 내 앞에 가져다 놓으신다. 내가 내 힘으로 하겠다는 자만을 내려놓거나 간절히 바랄 때 비로소 손을 내밀어 주시는 느낌? 나는 홀리듯 우연히 다가온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봄날의 햇살'같은 존재를 만났다. 그리고 덕분에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이치를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지치고 힘들었던 이유는 욕심과 기대 때문이다. 아이를 평균이라는 궤도에 올려놓으려는 무수한 나의 노력과 수고스러움이 성공의 결실로 돌아오지 않고 번번이 좌절될 때마다 아이에게 들던 미움과 분노.

나는 '우월'을 바라지 않고 그저 '평균'을 바랐기 때문에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더 원망스럽고 화가 났었다. 어쩌면 아이가 이렇게 된 건 나의 책임일지 모른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몸무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입덧 방지 주사를 맞지 말고 좀 참아볼 걸, 내가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하고 난산이라 이렇게 된 건  아닌지 자책을 하다 힘이 들면 남편 쪽 유전자를 탓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아이를 더 채해왔던 것 같다.


아..... 나는 왜 그렇게 밖에 살지 못했을까.


나는 나의 '봄날의 햇살' 덕분에 내가 부모로서 아이에게 진정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게 됐다. 나는 아이에게 지식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직과 성실, 타인에 대한 배려, 실패에서 회복할 수 있는 힘, 자기 조절력과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방식 같은 것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고 결과는 아이 본인이나 신이 주관하는 일인데 타인의 결과라는 영역까지 내가 제하고 하려고 드니 그렇게나 힘에 부치는 거였다. 이걸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깨닫는 어리석은 나지만 제대로 이해하면 또 성실하게 실천하는 내가 아니던가. 나는 아이를 더 이상 평균까지 끌어올리려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나는 그저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낳은 것이고 아이는 약점을 보완해 바뀌어야 되는 존재가 아니라 위에 열거한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모든 걸 다 포함해서 세상에서 하나뿐인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인데 이제야 각성되고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마침 여기가 '어떤 형태의 사람이든 괜찮은' 캐나다이기 때문일 수도.


나는 항상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 내가 걱정할 필요 없이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둘째가 더 예뻤다. 늘 둘째에게만 나의 사랑, 나의 보물, 나의 행복, 나의 위로라고 남발하곤 했는데.

이제는 온 마음을 다해 나의 보물, 나의 행복, 나의 전부, 나의 우주, 나의 스승, 나의 사랑 첫째!라고 자신 있게 외쳐본다.



"사랑이 이기지. 언제나 사랑이 이긴다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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