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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린이 May 08. 2021

일상에서 리듬감 찾기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http://aladin.kr/p/xnUua

아담 드라이버 주연의 영화 <패터슨>을 재미있게 봤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패터슨은 패터슨이라는 도시에서 버스를 운전한다. 매일은 비슷한 일의 반복이다. 같은 노선을 따라 버스를 운전하고, 같은 동료의 불평을 듣고, 저녁에는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길에 바에 들려 주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는 다양한 변주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버스의 승객의 이야기는 매일 다르고, 저녁에 들리는 바에서는 매번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사건이 일어난다. 다양한 변주 덕분에 일상의 반복은 단지 반복을 넘어 하나의 리듬이 된다.


마스다 미리 작가의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에서도 이런 리듬이 느껴진다. 이 책에서는 크게 3가지 이야기가 반복되며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작가가 만난 편집자 이야기, 체험활동에 참여하는 이야기, 그리고 작가가 되기 전 이야기다. 특히 편집자 이야기와 체험 이야기는 항상 같은 문장으로 시작해서(같이 처음 일하는 편집자를 만나러 갈 때는…, 나는 대부분의 일에 크게 흥미가 없습니다…) 책 전체가 하나의 시로 느껴지는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이 만화에서 리듬감을 만드는 다른 요소는 짧은 글의 호흡이다. 복잡하고 자세한 설명 대신 간결한 단어를 짧게 끊어서 배치한 문장 덕분에 만화의 대사가 아닌 동시를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앞에서 책 전체가 하나의 시로 느껴진다고 했는데, 이때는 각각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연처럼 느껴진다면, 이번에는 만화 속 각각의 컷이 하나의 연처럼 느껴진다. 커다란 시 속에 또 작은 시가 들어있다. 마치 시로 이루어진 러시아 마트료시카 같은 기분이다.


내 인생이 좌우될 것 / 같은 중요한 일을 / 정할 때는
남의 의견을 / 들어도 /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일을 / 실패했다고 해도
자신의 전부다 실패라고 /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 필요합니다.


<패터슨>과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에서 나는 우리 삶의 리듬감을 찾는 방법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적절히 섞인 반복과 변주다. 오늘과 내일이 너무 똑같다면 지루하고, 매일이 너무 극명하게 다른 하루라면 너무 피로할지도 모른다. 마스다 미리의 이 작품은 비슷한 구조를 나열했지만 그 안에서 조금씩 변주되고 변주된 이야기들이 서로 공명하면서 새로운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카페나 식당에서 편집자를 만나는 일상은 비슷하게 반복되지만 그 안에서 매번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무기력한 몸을 간신히 이끌고 나간 체험은 의외의 사실을 알려준다. 에피소드의 첫 문장은 모두 똑같지만 결국 그 과정과 결과, 깨달음은 각각 미묘하게 달라진다.


무리카미 하루키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고 운동하고 잠자리에 들며, 버지니아 울프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식사를 한 뒤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겉만 보면 매일이 같은 하루이고, 지루한 반복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반복 안에서는 치열한 고민과 발견이 일어나고, 그 안에서 수많은 변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분명 그들의 하루는 그다음 날과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패턴과 변주의 만남이 그들의 왕성한 창작의 비결 중 하나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 만화의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요소를 하나 더 찾자면 바로 여백이다. 모리 카오루 작가의 <신부이야기>는 종이의 흰 공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림이 세밀하다. 이와 비교하면 이 작품은 텅 비어 있는 느낌까지 준다. 하지만 세밀하게 대상을 묘사하고 비유한 소설보다 한 줄의 시에서 운율이 느껴지듯이 마스다 미리 작가의 간결한 작화 덕분에 작품의 리듬감은 더욱 살아난다.


요즘 나는 일분일초가 멀다 하고 무언가를 본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새로운 지식과 재미의 영상을 끊임없이 추천한다. 구독하는 뉴스레터도 이미 많이 쌓여 있어 메일함의 알림 숫자는 점점 커지고 있다. 인터넷서점의 보관함에는 읽고 싶은 책이 점점 쌓여간다. 보관함에 책이 쌓이는 속도는 나의 독서 속도를 압도한다.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보는 일을 잠시라도 멈추면 바로 뒤처지는 느낌이 든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그런 나에게 꼭 무언가를 채워야만 일상이 채워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지은 다리보다 간격을 두고 돌을 놓아둔 징검다리를 한 발자국씩 내딛을 때 오히려 리듬감이 느껴진다. 마스다 미리의 이 작품은 징검다리의 빈 공간과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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