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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린이 May 16. 2021

[책] 무언가를 성실히 사랑하는 것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김민철 작가 지음

나는 책의 문장을 오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읽은 바로 그 순간에는 너무 멋진 문장이라고 생각하고 메모장에도 적어놓고 포스트잇도 붙여놓는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그런 문장이 있었는지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 책을 넘겨보다가 “맞아 이런 문장이 있었지”하며 한 번 더 감탄하기 일쑤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이 문장 너무 좋더라”라고 말하며 읽은 책의 어떤 문장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럽다.


세세한 문장 하나하나 대신 책을 읽은 뒤에 나에게 많이 남는 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떤 ‘형상’이다. ‘책은 작가와의 대화’라는 말이 있듯이, 책을 읽고 나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누군가의 이미지만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 사람은 정말 저자일 수도 있지만, 소설에서는 화자일 수도, 아니면 내가 임의로 상상한 제3의 인물이기도 하다.


어떤 에세이에서는 똑 부러지는 선배와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삶에 대한 조언을 듣는 모습을 상상했다. 내가 너무 신뢰하는 그의 경험과 생각을 들으면서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최근에 읽은 소설에서는 자신이 평생 해온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노인이 따뜻한 난롯가 흔들의자에 앉아 과거를 들려주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떨까?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것을 마음껏 이야기하는, 그래서 너무나 행복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 행복하게 이야기해서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라도 작가의 치즈 사랑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책의 주제가 치즈라는 걸 알고 우선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치즈라니, 이 얼마나 ‘에세이로 쓰기 완벽한 주제’란 말일까. 우선 치즈는 누구나 알고 접하기 쉬운 음식이다. 작가가 책에서 말했듯이 “한식의 5대 재료,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그리고 치즈”의 그 치즈가 아닌가. 그만큼 치즈는 누구나 그 맛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친근한 음식이라 작가가 맛을 설명할 때 나도 모르게 침이 고이고 함께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치즈는 종류가 정말 다양하다.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체더 슬라이스 치즈부터 볶음밥에 뿌려서 살살 녹여 먹는 모차렐라 치즈, 카망베르 치즈, 리코타 치즈 등 종류가 너무나도 다양하고 소재가 풍부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장맛이 집마다 다르듯 같은 치즈라도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만들었냐에 따라 특색이 달라지니 이런 다양한 치즈 맛의 묘사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울러 그 치즈와 함께한 작가의 감정과 경험을 같이 듣다 보면 맛있는 리코타 치즈를 곁들인 샐러드를 먹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다양한 치즈는 그저 맛만 다른 게 아니다. 마트에서 파는 슬라이스 치즈부터 국내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귀한 치즈까지 가격과 등급도 다양해 보편성과 ‘전문성’을 함께 발휘할 수 있는 소재다. 책의 마지막 장(章)에는 작가가 개인적으로 아끼는 치즈들과 그 이유를 적어놓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치즈부터 ‘이게 치즈 이름이야?’하는 치즈까지 작가의 깊은 식견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사실 작가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작가의 치즈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 덕분이다. 작가는 구하기 어려운 치즈라고 귀하게 여기고, 마트에서 파는 치즈라고 해서 푸대접하지 않는다. 프랑스 노르망디 카망베르 치즈부터, 편의점에 파는 스트링치즈까지, ‘치즈’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이런 작가의 성실한 사랑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함께 즐거워진다.


치즈라는 소재의 탁월함에 한참 이야기했지만, 사실 나는 책이 치즈에 관한 책인지, 와인인지, 라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안다. 중요한 건 내가 인생을 통틀어 이처럼 성실히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냐는 점이다. 작가의 삶이 조금 더 빛나 보이고, 조금 더 다채로워 보인다면 그건 작가가 ‘치즈’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치즈를 ‘사랑’해서다. 나도 작가의 치즈 같은 대상을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마트에서 카망베르 치즈를 사서 오븐에 살짝 굽고 메이플 시럽과 그래놀라를 뿌려 먹었다. 내일은 냉장고에 있는 크림치즈를 크래커에 발라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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