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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찻집 주인장 Dec 08. 2019

[안녕, 영국] 걷다

디톡스(Detox)

  모르는 길은 일단 걷고 본다. 타고난 길치가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본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일단 발걸음을 떼고 본다. 거리가 눈에 익을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처음엔 터벅터벅 걷는다. 그러다 곧 좌우를 구경하고, 하늘을 쳐다보며 걷는다. 무심히 지나쳤던 풍경이 시야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바닷가 내음이 풍기고,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느리게 걷고, 하늘이 새파랗다. 바람과 공기는 아직 차갑지만 상쾌하다.


클라네클리, 웨일스. 2019년 2월


  이곳의 인상은 런던만큼 세련되지 않다. 다소 투박하다. 그래서 좋다. 행색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그저 투박하고 털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때로는 타인에게 인지되지 않고, 인식되지도 않는 환경이 필요할 때가 있다. 본연의 모습만으로 충분한 곳에, 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괜찮은 환경에 머물러야 하는 때가 있다. 타의로 부여된 이름과 역할을 훌훌 털어버리고, 그것들로부터 비롯된 왜곡된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의 건강관리를 위해 정기적인 디톡스가 필요한 것처럼, 마음과 정신의 건강관리를 위해서도 디톡스가 필요하다. 진짜 내가 아닌 것들, 묵은 때를 벗겨내야 한다. 지금은 마음에 붙은 독소를 제거하는 시간이다.  


클라네클리, 웨일스. 2019년 2월


  거리가 제법 익숙해지고 나니, 길가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이 반가워지기 시작한다. 언제 피었는지 모를 하얀 들꽃도, 짙붉은 동백도 그저 반갑다. 예쁜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 여유가 다시 찾아들고 있다는 증거다.


홀가분하다. 쾌활하다. 시원하다. 싱그럽다. 어여쁘다. 곱다. 눈부시다. 환하다.


  내 삶에 되찾고 싶은, 초대하고 싶은 말들이 하나, 둘 다시 찾아들기 시작했다. 매우 반갑다.





- 여행 6개월 후 첨언 -

원래 자리로 돌아오면 환경이 똑같으니 말짱 도루묵이 되지 않겠느냐고? 디톡스 후, 독소가 쌓여 있던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고 나니 같지 않다. 다르다. 같은 환경을 다른 눈으로, 다른 맷집으로 대할 힘을 충전하고 난 이후 나의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더라.


결론 : '마음의 디톡스' 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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