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벨로(Portobello)의 기억을 기억하다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람들 틈에 끼어 왁자지껄한 시장 골목을 돌아다니고 싶어 졌다. 그럴 땐 노팅힐(Notting Hill)로 가야 한다.
특유의 환한 미소만으로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줄리아 로버츠와 영국의 국민 배우 휴 그랜트가 함께 열연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노팅힐'을 실제 촬영했던 장소다.
튜브를 타고 노팅힐 게이트 역에서 내려 사람들이 향하는 곳으로 따라 걷다 보면 포토벨로(Portobello) 거리에 다다른다. 도로의 양 옆으로 알록달록한 색감의 주택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맞게 잘 찾은 것이다. 곧이어 빈티지와 엔틱 상점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가운데 길엔 장이 열려 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만 열리는 플리 마켓(Flea Market)이다.
이곳은 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2013년 엄마와 함께 여행하면서 같은 길로 걸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오가는 사람들만 달라졌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거리는 똑같아 보인다. 같은 모양과 색깔, 느낌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하다.
굳이 사진을 찍지 않았다. 예전에 찍어둔 사진들이 노트북에 한가득 저장되어 있다. 이미지는 이미 충분하다. 이번 여정 중에는 렌즈로 담아낼만한 순간을 찾아내려 애쓰기보다 보이는 대로, 눈에 들어오는 대로 그냥 감상하기로 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하지 않은 아닌 맨 눈으로.
(주(註). 이번 지면에 실린 모든 사진은 2011년, 2013년 촬영본임)
아쉽게도 사진은 찍힐 당시의 감상을 고스란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그 날의 공기와 분위기, 냄새, 소리, 느낌, 감정 등 내가 진짜 담아두고 싶은 것들을 한 컷의 이미지 안에 모두 담기란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사진을 찍는 이유는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의 기억을 기억하고 싶어서다. 기억을 저장하기 위해서다.
6년 전, 이 액세서리 가게 앞을 잰걸음으로 지나다가 홀연 되돌아왔었다. 실내로 들어가서 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오밀조밀하게 진열해놓은 장신구들을 바라보며 서성이고만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카메라를 꺼내 들어 재빨리 한 컷 찍고는 달아나듯 지나갔다. 딱히 액세서리가 사고 싶은 건 아니었다. 가게 분위기와 장신구가 너무 예뻐 보여서 그냥 지나치기에 아쉬웠다. 그리고 그게 그냥 부끄러웠다.
가게를 지나며 그때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기억 속의 내가 사뭇 귀엽다.
색색의 빈티지한 스틸 틴 벽장식 가게를 또다시 지난다. 반갑다. 건너편에서 지나다가 사진을 찍었던 지난번 여행이 떠올랐다. 가게의 분위기가 맘에 들어 멀리서 사진만 찍고 지나쳤었다. 여행 사진을 찍기 위해, 쓸만한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섰던 기억이다.
이번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에 걸려있는 장식을 만져보고, 가게 안쪽에서 구경하는 손님들과 몸을 부대끼며 둘러보았다. 그 시간과 장소의 이미지는 렌즈 대신 눈으로 남기고, 머릿속에 잘 저장해 두고, 대신 글로 남겨두자 했다.
포토벨로를 생각하면 거리 양 쪽으로 죽 늘어선 건물 외벽의 환하고, 따뜻하고, 쾌활한 색감이 떠올라서 항상 기분이 좋았다. 날씨가 화창한 여름날에 찾아왔을 때는 하얀 뭉게구름이 펼쳐진 새파란 하늘과 파스텔 톤의 거리가 하나의 풍경화처럼 한 데 어우러져 분위기 자체로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듯했었다.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동화 속 이야기의 주인공 된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솜사탕처럼 폭신한 느낌의 좋은 기억이었다.
6년 전에도 포토벨로는 변함없이 경쾌하고 활기찬 공간이었고, 난 이곳의 그런 분위기와 기운이 마냥 좋았다.
일상 속에서 마음이나 생각이 무채색으로 단조로워질 때면, 여행의 기억을 꺼낸다. 포토벨로는 잿빛 일상이 드리워지는 날 가장 자주 소환되는 장소다. 흥겨운 기분으로 거닐었던 과거의 그때, 그 날의 감상을 현재의 나에게로 불러들여 포토벨로 거리의 고운 색으로 마음을 다시 채색하는 것이다.
여행의 기억은 힘이 제법 강하다. 과거의 시공간을 현재로 이어놓을 만큼,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다시 말을 걸고 그때처럼 웃게 할 만큼.
2019년 2월, 포토벨로 플리 마켓에 다시 들어섰다. 과거의 기억만큼이나 왁자지껄하다. 오전에 비가 내려 땅은 젖었지만 날씨는 다행히 개였다. 사람들 틈에서 빈티지 물건도 구경하고, 길거리 음식을 먹는 사람들,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관찰하고, 여전히 색이 예쁜 건물의 외벽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인파 사이로 음악 소리가 들린다. 버스커의 노랫소리가 도로 위에 깔린다. 소리를 쫓아 걸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 음악 소리가 뒤섞여 공간을 울리고, 메운다.
불현듯 지금 이 순간이, 이 순간의 무언가가 줄곧 그리웠다는 생각이 든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오래도록 쉬이 잊히지 않았던 그 무언가를 다시 만난 듯이 반갑다.
이곳의 공기가, 이방인으로 이곳을 걷는 기분이 그리웠을까. 나대로 오롯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자유, 그런 것이었을까. 무엇이 그토록 그리웠을까. 무엇을 그리워했던 걸까.
버스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한참 자리에 서 있었다. 영화 '김종욱 찾기'에 나온 대사가 떠올랐다.
도대체가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서요.
도대체 공기가 어떻고, 냄새가 어떻길래.
...
어떤 나라예요, 점장님?
도대체 뭐길래, 십 년을 기억하냐고.
냄새도, 공기도, 사람도
도무지 잊혀지지가 않는대요.
그게 도대체 뭔데?
남자 주인공 '한기준(공유 분)'이 10년 전 인도 여행에서 만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 주인공 '서지우(임수정 분)'를 좋아하게 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내뱉는 독백 같은 본심.
이내 아련한 마음이 된다. 떠나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마음. 그게 무엇인지 도대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도무지 잊히지 않는, 쉬이 잊을 수 없는 그 무언가, 여행 후에 분명히 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어서다.
매번 그것이 그리워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면서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아직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허나,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은 없다. 딱 알맞은 표현을 찾아내지 못하는 편이 차리라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정답을 찾으면 그걸로 끝이 나지만 그리운 것들, 잊히지 않는 것들을 그리운 그대로 내버려 두면 끝이 없이 계속될 테니, 도대체 설명할 길 없는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까지 여행의 일부가 되고, 나의 여행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셈이다. 난 그게 좋다.
과거와 현재의 나를 자유로이 오가며, 있는 그대로의 나로 오롯이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며, 끝나지 않은 여행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미래의 내가 말을 걸어올 오늘의 나로 여행하며 살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