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습관, '관찰'과 '발견'
런던 도착 이틀 째, 여독이 채 풀리지 않았다. 묵고 있는 방 창문은 겨울용 두꺼운 커튼으로 단단히 차단되어 있다. 빛이 들지 않아 다행인 것 같다. 오전 내내 밀린 잠을 청하다 점심때가 다 되어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프다.
겨울 점퍼를 꼭 여며 입고는 밖으로 나섰다. 매서운 추위는 아니지만 제법 쌀쌀한 날씨다. 안 그래도 평소 길 눈이 어두운 편인데, 숙소 매니저가 알려준 식당가는 이미 지나친 것 같다.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 하며 발견한 곳이 Le Pain Quotidien이었다. 반가웠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자주 가던 프렌치 베이커리 카페였다. 핫 초콜릿을 주문하면 도자기 사발처럼 생긴 그릇에 한가득 따뜻한 우유와 녹인 벨기에 초콜릿이 담겨 나왔었다. 나무 냄새나는 테이블에 몇 시간씩 앉아 핫 초콜릿을 홀짝 거리며 리포트를 쓰고, 과제를 하던 때가 생각났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샌드위치와 음료를 시켰다. 옆 자리에 너 덧살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와 엄마가 식사를 하고 있다. 아이는 얌전히 엄마가 주는 대로 잘 받아먹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니 놀란 듯 바라본다. 이 아이에게 나는 몇 번째 만나보는 동양인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 공간 안에 동양계 사람은 나 혼자다. 식사 중인 몇 사람들이 힐끔 쳐다본다.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주문한 음식 맛이 생각보다 괜찮다. 천천히 조금씩 먹으며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옆에 꼬마 아이와 눈도 맞추고 한다. 다른 옆쪽으로 커플로 보이는 젊은 친구들이 마주 앉았다. 썸을 타는 듯한 분위기다. 역시 힐끔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대화를 이어간다.
요즘 방탄소년단이 유럽에서 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하던데 덕분에 동양인들에 대한 인식이 좀 달라졌을까 궁금하다. 얼마 전 웸블리 스테디움에서 방탄소년단 콘서트가 열렸는데, 콘서트를 마치고 이동하는 인원이 하도 많아서 새벽까지 런던 지하철을 연장 운행했다고 한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란다. 콧대 높은 런던을 움직이다니, 한류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사람이든 사물이든 말없이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발견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야기 나누는 게 항상 흥미로웠다.
습관은 지금도 여전하다. 어딜 가든 말없이 먼저 관찰하고 나름대로 파악한다. 여유 시간이 있을 때마다 혹은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커피숍이나 서점에 들러 창 밖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여행 중에도 그렇다. 특히 여행 첫날엔 어김없이 커피숍에 들러 주변의 공기와 사람들을 관찰한다. 사람들의 분위기는 어떤지, 표정은 어떤지, 옷차림은 어떤지 등등 일상적인 것들을 관찰한다. 여행을 관찰로 시작하는 이유는 너무 무리하지 않기 위해서다. 최대한 그곳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현지인과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그들의 생각하는 방식을 유추하며 현지인처럼 지내다 조용히 떠나오는 여행을 하다 보니 나의 여행엔 To-do 리스트가 없다. 굳이 만든다면 최대한 자주 현지인들과 접촉하고 대화할 기회를 갖는 것. 내 여행의 목적은 관찰하고 발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다 보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믿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설령 나의 상식이나 경험과 다른 것들을 말한다 할지라도 우선은 그대로 수용하면 새로운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나의 작은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깨어지고 확장된다. 다양하고 거대한 세상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관 의례는 나의 앎을 잠시 뒤로 감추어두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의 세상과 다른 세상에 대한 판단을 잠시 내려놓으면 내가 아는 작은 지식도 판단받지 않으며 더 넓은 지식으로 나를 채울 수 있다. 선입견이 무뎌지면 대신 분별은 예리해진다.
올해(2019년) 다녀온 곳들을 포함해 지금까지 제법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워낙 새로운 세계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100,266㎢ 에 달하는 대한민국의 내부 사정만으로는 호기심의 욕구를 다 채우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 곳에만 머물러 살기에는 이 세상은 지나치게 넓고 지구 저편에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흥미로운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나돌아 다닌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또다시 여행하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할 정도로 기회만 생겼다 하면 한국을 떠난다. 열일곱 살에 처음 떠났던 일본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다니고 있으니 거의 방랑벽 수준이다.
나의 여행은 관광과 거리가 멀다. 명소를 구경하고 인증샷을 찍고 계획한 스케줄을 완수하는 여행은 잘 못한다. 관광이 싫다거나 별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일상과 단절된 이벤트를 즐기지 않는 것뿐이다. 굳이 부연하자면, 새로운 환경에 왔으니 적당히 나른한 상태로 나에게 적응할 시간과 여유를 주자는 핑계이고, 조금 더 솔직해져 본다면 알차게 짜인 스케줄대로 관광을 하기엔 몸과 마음이 게으른 편이라 새로운 환경을 즉흥적으로 즐기고 싶은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소 나의 성격은 적당히를 모른다. 일이든 사람과의 관계든 맺고 끊음이 명확하고, 무엇이든 계획대로 끝장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다. 하지만 여행만큼은 계획도 목표도 없이 좋은 게 좋은 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 그리하여, 나의 여행의 모토는 '최대한 느긋하게, 천천히, 체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러고 싶기 때문이고, 게으르기 때문이고, 지금까지 느리게 즐겨 온 여행이 모두 즐겁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흘러간 여정들 덕분에, 일부러 애썼다면 절대로 만들 수 없었을 인연을 만나왔기 때문이다.
여정마다 숨겨진 만남의 마법을 잘 알고 있기에 나의 여행은 항상 느리고 게으르다. 나태하고 게으른 여행의 맛은 맛을 본 사람만이 그 매력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