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포주의: 영화 내용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컷 울었다. 두 눈이 새빨갛게 부어 올라 쓰라렸다. 야심한 시간에 이렇게 운 건 오랜만이었다.
영화관의 불이 켜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자리를 뜨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뭉클한 마음을 추스르며 너무 울어버린 얼굴을 감춰야 했다.
가히 명불허전.
최민식(장영실 역)과 한석규(세종대왕 역) 두 주인공의 호흡은 그야말로 알파와 오메가였다. 연기파 배우로 30년 이상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수들에게 구태여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영화야말로 두 사람의 꽉 찬 연기 내공의 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천문:하늘에 묻는다'는 세종 24년에 실제 일어났던 '안여(安與) 사건(왕의 가마인 안여가 부서진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팩션(Faction) 사극이다. 왕과 관노로서 하늘과 땅만큼 큰 신분의 격차를 가진 두 사람이 한 뜻을 품고, 같은 꿈을 꾸며 서로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벗이 되어가는 과정을 서정적인 영상과 음악 위에 풀어놓았다.
장영실과 세종대왕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는 서사는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인 ’별'을 매개로 흘러간다. 칠흑 같은 흑암 가운데 별이 더욱 빛나는 것처럼, 조선과 세종대왕을 둘러싼 상황이 점점 어두워지는 가운데서, 뜻을 함께하는 벗인 장영실과의 우정은 더욱더 빛을 발한다.
자네 같은 벗이 있지 않은가
이야기가 극으로 치달을 무렵, 세종대왕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며 던진 대사 한마디에 마음이 울었다. 원래 시나리오 상에는 없던 대사라 한다. 한석규 배우가 촬영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내뱉은 애드리브였다. 연기에 몰입한 배우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대사가 결국 이 작품을 한마디로 정리해 준 셈이다.
영어의 ‘appreciate’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상황에 따라 ‘감사하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thank’ 보다는 함의가 깊은 표현이다. 누군가(무언가)의 본연의 가치에 대한 인정과 감사를 나타내는 단어다.
appreciate [əˈpriːʃieɪt]
1. 진가를 알아보다 [인정하다]
2. 고마워하다; 환영하다
3. (제대로) 인식하다
(출처: 네이버 영어사전)
나의 진짜 가치를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나의 존재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이를 곁에 두는 것만큼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마음을 함께하는 벗이 있다면 즐거운 길이든, 어두운 길이든 기꺼이 함께 걸을만한 힘과 용기가 저절로 생길 것만 같다.
지음(知音). 적어도 이 영화 속에서 세종대왕과 장영실은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이들의 우정은 인간이 밤하늘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밝고 빛나는 존재들 - 북극성과 나란한 별 - 에 서로를 견주어 칭하며 기뻐하는 우정이었다. 별보다 더 반짝이는 무언가였다.
나를 별이라 칭해주는 북극성 같은 이를 만날 때, 인생은 비로소 반짝이기 시작한다. 나의 빛을 알아보고, appreciate 하는 또 다른 빛을 만나면 나의 빛에도 의미가 생긴다. 나의 소리(音)를 이해하는 사람과 함께 소리를 내면 소음이 아닌 화음을 만들 수 있다.
'천문' 개봉 이후,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최민식 배우가 이렇게 말했다.
한석규와 할 때가 됐다..
눈만 봐도 안다.
두 사람은 실제 대학 선후배 관계란다. 1999년 개봉했던 '쉬리'에 함께 출연한 이후로 '천문'에서 20년 만에 다시 만나 호흡을 맞췄다. 30년 넘는 우정을 지속해 온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한다고 했고, 그만큼 깊은 감정선으로 연기를 뿜어냈다.
-둘의 감정이 짙게 드러나는 장면들이 많은데.
▶리허설을 많이 안 했다. 그런 장면은 리허설을 하면 안 된다. 테이크를 많이 갈수록 감정이 소모되니깐. 세종과 영실, 영실과 세종이 서로의 마음을 읽는 장면들인데, 석규랑 그냥 눈만 보면 알았다. 내가 대사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 석규가 그걸 받아서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허진호 감독이 믿어주고 맡겨줬다.
석규와 오랜 우정이 영화 속 세종, 장영실의 관계에도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냥 석규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알겠다. 현장에서도 서로 별말을 안 했다. (연기를) 그냥 주면, 그대로 받아서 다시 줬다.
(출처: 스타뉴스)
유명 초코과자의 CM송 가사처럼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보아도 아는' 우정을 나눈 친구와 좋아하는 일까지 함께하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132분 러닝타임 내내 조선의 왕궁 안에서 뭉클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다 깨어난 듯했다. 북극성과 그와 나란한 밤하늘의 별이 불현듯 함석헌 선생님의 시구와 같은 질문을 건네는 것 같다.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