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보다 태도를 선택하는 여행

베트남, 푸꾸옥에서

by 서린

크리스마스와 아이들 방학이 겹친 연말, 가족여행을 떠났다. 연말에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다. 남편이 먼저 가자고 했고, 나는 딱히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은 채 따라나섰다. 그래서인지 여행 준비에 마음을 많이 쓰지 않았다. 출발 직전 짐을 후다닥 쌌고 여행길에 올랐다.



한 달 전, 남편이 숙소와 비행기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남편이 얼마나 바쁜지 알기에 내가 맡았다. 말을 듣자마자 여행지를 선정해서 30분 만에 항공권 결제를 마쳤고, 이어서 30분 동안 숙소 두 곳을 골라 링크를 보냈다. 그날 밤, 남편은 우리가 가는 곳은 어디인지 왜 그곳으로 가는지 너무 빨리 결정한 것 아닌지 숙소는 어떤 곳인지 이런저런 조건을 살피며 나의 선택에 대한 우려를 비쳤다. 나는 하자고 하는 것들에 대해 찬성하지만 시간을 투자해서 고민을 할 만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어렸을 적 나는 여행지를 선택하고 수많은 옵션들을 비교해가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여행을 예약하면서 즐거움을 미리 상상해보기도 하고 한껏 기대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여행지에서도 일상을 이어가고 싶다. 나의 주된 고민은 내 본업에 충실할 것. 여행지든 아니든 내 일상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여행에 대한 경험치가 많이 쌓이다 보니 선택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떤 환경이 펼쳐지든 그 환경을 사랑하자는 방향으로 바뀌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투자할 수 있는 시간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남편이 정하는대로 나는 따르겠다고 했다. 장소에 대한 선택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을 대하는 나의 태도라는 걸 남편이 이해했다.



시부모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해외여행을 하고 싶어하셨다. 국내 여행은 자주 다녔지만, “언제 너희랑 외국에 나가볼까”를 입에 달고 사셨다. 마침 예약한 숙소에 방도 여유가 있어 시부모님이 생각났다. 함께 가시겠냐고 여쭤보니, 흔쾌히 좋다고 하셨다. 여쭤보는 순간 ‘이게 맞나’ 하는 마음이 1초 스쳤지만, 이왕이면 잘된 일이라 여겼다. 부모님이 원하셨고,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시간이 되리라 믿었다. 무엇보다 늘 감사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나는 시부모님 앞에서 말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순간도 많다. 때로는 내 기준으로 ‘이건 아니다’ 싶은 일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을 존경하고 존중한다. 그래서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고 되뇌이지만, 매번 쉽지는 않다. 어머님은 어머님 나름의 인생의 전투를, 아버님은 아버님 나름의 전투를 치르며 오늘에 이르셨다. 그 모든 시간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나보다 몇십 배는 더 많은 삶을 통과하셨을 것이다. 그 앞에서 나는 아직 많이 작다. 가족 안에서 가끔 긴장이 흐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보고 배우게 된다. 우리 가족이 가진 장점이 있고, 남편 가족이 가진 장점이 있다. 서로 다른 유기체 안에서 삶이 돌아가는 방식이 신기하고도 흥미롭다.



여행을 앞두고 문득 좋은 영감이 떠올랐다. 이번 여행에서 시부모님의 깊은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책자로 만들어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며칠간 그 생각에 들떠 있었다. 여행 자체는 여전히 크게 기대되지 않았지만, 이 기회를 통해 시부모님과 조금 더 깊이 연결될 수 있겠다는 마음에 설렜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쓸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우리는 부모님과, 시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늘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느라 바쁘다. 역할 너머의 이야기까지는 좀처럼 닿지 못한다. 부모라는 이름 안에 갇혀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함께 있어도 서로의 깊은 생각까지 닿기는 어렵다.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부푼 마음으로 여행지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또다시 ‘역할’에 갇혀 서로를 배려하느라 분주해진다. 나는 며느리이자 매개자의 역할을 맡는다. 어머님은 방은 전부 너희 편한 대로 쓰라 하시고, 나는 또 부모님이 가장 편하실 방을 고르느라 우왕좌왕한다. 식사 자리에서도, 음식을 덜어낼 때도 늘 “너희 먼저”, “부모님 먼저”가 오간다. 도착 첫날 비가 내렸고, 리조트 버기는 잘 오지 않았다. 직원들과는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았고, 가려던 식당은 만석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어느새 날이 서 퉁명스러워졌고, 아버님은 의견이 생기셨으며, 어머님은 말수가 줄어들었다. 순간들이 점점 깊이를 잃어가는 느낌이 올라왔다.



나는 이제 호화로운 리조트에서 어디를 다녀왔다는 식의 얕은 여행 경험은 그만하고 싶다. 나 역시 몸이 고단했고, 여러 사람을 신경 쓰느라 정작 나 자신부터 깊이를 잃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비행기 안에서 온전히 책을 읽을 수 있어 행복했고, 출국심사, 셔틀버스 모든 것들이 일사천리로 잘 흘러갔다. 버기가 오지 않았기에 운치 있는 리조트를 우산을 쓰며 걸을 수 있었고, 가로등 아래 보슬비와 함께 반짝이던 작고 하얀 꽃들을 보며 미소지을 수 있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늘 친절했고, 최선을 다하려는 직원들의 태도에서 따뜻함도 느꼈다.



남은 며칠, 나부터 나를 잃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나부터 에너지와 사랑을 채워 남은 시간을 더 깊이 있게 살아가고 싶다. 어쩌면 가장 깊이를 잃고 있었던 사람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이 순간들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에 더 연결되어, 주변의 에너지에 휩쓸리기보다 내가 먼저 깊은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다.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만으로도 충만하고 감사하다. 깊이를 선택한다는 건, 상황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태도를 바꾸는 일이다. 이번 여행이 갑자기 너무 기대된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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