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가르쳐야 하나 항상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부모로서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게 된다.
한 때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싶었다. 돈을 벌어 더 나은 교육을 시켜주고 싶고 돈을 벌어 더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고 돈을 많이 모아 그것을 물려주는 것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돈으로 줄 수 있는 가치들이 분명 있기에 돈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높은 연봉을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돈을 제법 잘 모았고 이십 대 후반 부동산 청약에도 성공했었다. 물론 출발선이 좋았기에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연봉이 높지 않았음에도 사회생활을 하며 돈을 모을 수 있을 만큼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된 환경에서 살았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모아 온 돈도 제법 있었다. 다 부모님 덕이었다.
재산을 모으고 증식하는 데 순전히 '나의 금융지식'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내 의지보다도 부모님의 가르침으로 저축해 두었던 돈이 있었고, 월급의 일부를 꼭 저축하라는 가르침에 의해 저축을 했으며 운이 좋아한 때 부동산 청약에 성공하여 부동산을 소유했던 것이었다. 돈에 대한 지식과 개념이 크게 없었던 나로서는 이렇게 모아 둔 재산을 지킬 능력이 있기 만무했다. 더 먼 미래를 보지 못했고 미국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꿈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마음 밖에 없었다.
믿을 구석이 있었던 나와 남편은 철이 없었다.
어쩌면 철이 없었기 때문에 각자가 하고 싶은 커리어를 추구하며,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마음으로 아이를 낳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먼 미래는 보지 못했지만 마음속에서 나는 이미 부자였다. 그렇게 나는 너무 이른 나이에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며 장학금과 최저 생계비 정도를 받았지만 소득은 적고 지출은 하염없이 늘어갔다. 자산소득도 없으면서 뭘 믿고 이렇게 돈을 많이 쓰고 있을까 싶은 날들이 이어졌다. 웃긴 것은 돈을 정말로 많이 쓰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행복지수가 높지 않았다.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액수를 지출하고 있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돈을 퍼부으며 (내 기준이지만) 살고 있는데 만족감이 높지 않았다.
육아에 지쳐 숨이 막힐 것 같은 하루 뉴욕에 다녀오자 싶었다. 내가 사는 곳도 뉴욕에서 두 시간 거리의 나름 큰 도시였음에도 충족되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디저트, 더 좋은 옷과 물건들을 갈구했던 나의 욕망은 끝이 없어 보였다. 뉴욕까지 편도 택시비로 40-50만 원을 지출했다. 그리고 쇼핑을 해도,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아도, 샴페인을 마셔도, 친구를 만나도 기분 전환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나의 스트레스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채워지지 않음은 분명했다.
그러다 문득 나와 남편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이런 부모가 될 수는 없다 싶었다.
어느 날 아침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고 난 뒤 나는 부모로서 어떤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부터 내가 시작한 고민이 바로 부모로서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무엇인가였을 것 같다.
행복은 더 많은 소비와 윤택해 보이는 삶에서 오지 않았다.
엄청난 해방감과 자유는 '사고의 전환'에서 왔다.
그저 앉아서 생각을 했을 뿐인데 그 어떠한 때보다 더 큰 환희와 만족감,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그 당시 행복은 아래와 같은 순간에 찾아왔다.
새벽 아이들이 자고 있는 틈에 일어나 나만의 공간에 들어갈 때.
슬랜트 보드 위에 올라가 종아리를 스트레칭하며 평온한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 하루를 잘 살기 위한 주문을 걸면서.
집 앞에서 운동을 마치며 온몸 구석구석에 집중할 때.
책을 읽어나가며 미래를 처음부터 다시 그리기 시작할 때.
시간이 지나면서 유산에 대한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긴 하나 큰 맥락에서 보면 일맥상통한다.
조금 추상적이지만 나의 생각과정을 글로 담아본다.
균형: 삶의 경계를 세워라.
재작년까지는 '균형'과 '절제'를 키워드로 삼았다.
아이들이 자신만의 균형점을 잘 찾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싶다.
균형을 잘 찾기 위해서는 양극단을 모두 경험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거 위험해' 혹은 '그럼 안 좋아'라는 말만 듣고 두려워 시도해보지 않은 채 삶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해본 뒤 본인 만의 비판적 사고를 바탕으로 중심을 잡는 것이다.
마음만큼은 단 것을 최대한 안 주고 싶지만 샤워하러 가자고 설득하며 아이 입에 초코볼을 넣어주는 나다. 설탕이 너무 많이 들어간 것은 몸에 좋지 않아라고 말하지만 비일관적인 엄마의 행동과 무언의 통제 아래 아이들의 욕구는 점점 더 커져간다. 그러나 결국 아이가 나이 먹어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스스로 많이도 먹어보고 적게도 먹어보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경계를 찾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성인이 되어서는 술 담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단 뭐든 인과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사회적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본인이 하고자 하는 행동을 일단 할 만큼 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러면서 그 행동이 초래하는 결과를 스스로 느끼게끔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안내해 주고 스스로의 힘으로 균형 잡을 수 있도록 옆에서 믿고 지지해주고 싶다.
돈도 마찬가지다. '부', '가난' 모두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관념이다.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면 가난도 느끼지 않겠지만 일단 풍요로움이던 부족함이던 모든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싶다. 아이들이 스스로 아주 가난하다고 느껴보기도 하고 아주 부자라고 느껴보기도 했으면 좋겠다. 그 가운데 자신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젊었을 때 돈을 다 잃어보는 경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돈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돈이란 것도 자신의 그릇만큼 담을 수 있기에 스스로 자신의 그릇이 어떤 그릇인지 알아가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균형'과 일맥상통한다.
'절제'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할 수 있지만 기꺼이 하지 않는 것. 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돈된 삶을 위해 절제하는 것. 그 절제를 통해 균형도 함께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돈이 있어도 절제하는 것, 힘을 쓸 수 있어도 쓰지 않는 것. 정말 적재적소에 자원을 쓰기 위해 시간이 되었건 돈이 되었건 힘이 되었건 간에 절제하며 사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정도를 지나치는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양극단을 경험해 보면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중심이라 부르겠다.
그 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
도파민을 충족하는 것이 끝도 없음을 경험했다.
새롭고 더 자극적인 것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비단 물질에 대한 소비에 국한하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나 보여지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스스로를 정도에서 더 멀어지게 하는가.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더 멋있어지기 위해 더 명예로워지기 위해 더 부자가 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정도를 지나칠 때가 있다. 목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목적에 빠르게 가기 위해 정도를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 아이라면 그 목적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고 싶다.
네가 생각하는 그 목적이 정말 맞는 목적일까. 너는 스스로에게 충분하지 않다고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하지만 일단 어떠한 목적이든 목표든 마음껏 세워봐라.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역량과 경계를 잘 파악했으면 좋겠다. 때론 넘치기도 부족해보기도 하면서 중심을 세워보았으면 싶다. 그리고 중심이 섰다면 절제하고 살아라. 중심에 늘 가까이 설 수 있도록.
성장: 너의 울타리를 깨고 나와라.
균형과 절제를 지나 작년에는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향했다.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삶의 영역을 넓혀가는 방법을 몸소 본보기로서 보여주며 그 방법을 또한 전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나는 아직 나의 울타리를 깨고 나오지 못했다.
그렇기에 정말 매일같이 치열한 삶을 보내고 있다. 일분일초 정말 소중하게 보낸다. 모든 에너지를 나의 성장을 위해 한 곳으로 모으는 중이다.
내가 요즘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울타리를 깨고 나와 삶의 영역을 넓혀가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울타리가 좁았던 사람들도 있고 아주 넓었던 사람들도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울타리를 깨고 나온 분들은 정말이지 늘 존경의 대상이다. 마찬가지로 원래부터 좋은 환경에서 산 사람들이라도 자신의 울타리를 깨고 나와 더 넓고 큰 세상에서 사는 모습도 대단하다. 부모의 울타리에서 여전히 갇혀 사는 것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졌던 영역을 넘어 자유롭게 더 넓고 더 높게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그 어떠한 사람도 존경하게 되고 본받고 싶다.
부모로서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끊임없이 탐구하며 주체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부터 내가 10년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다.
운동하는 습: 몸과 마음은 하나다.
올해 들어서는 구체적인 행동의 일환으로 아이들에게 운동하는 습관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생각이 아주 강력하게 들었다. 또 단단한 마음의 중심이 곧 신체의 정렬과 힘, 유연성, 심폐지구력 등의 종합적인 건강함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특정 운동을 통해서 분명 몰입하는 법, 절제하는 법, 인내심을 기르는 법, 균형을 잡는 법, 또 실력을 향상하고 성장하는 법 등을 모두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삶에서 어떤 답답함이 찾아오거나 고민이 가득 쌓일 때, 힘든 일을 겪으며 갈피를 찾지 못할 때 운동을 하며 앞으로 묵묵히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삶의 동반자와 같은 취미생활이 운동이 아닌 어떠한 것이 되어도 상관없다. 그런데 여전히 몸을 단련하며 정신을 단련할 수 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많은 돈으로 물론 '균형' '절제' '성장' '운동하는 습관' 등을 아이들에게 더 다양한 방식으로 접하고 배우게 해 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돈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어떠한 방식 혹은 지혜보다도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고 싶다. 부모가 먼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이가 스스로 어떠한 삶을 살지 선택하는 순간 우리의 삶이 하나의 좋은 선택지로 아이들에게 다가갔으면 한다.
무엇을 유산으로 남기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은 계속 변화해 간다.
내가 보는 만큼 아마 생각할 테니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계속 더 넓게 보고 멀리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