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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Aug 29. 2019

식구들 챙기고 출근하는 엄마,
옷만 입고 나가는 아빠

[엄마의 이름을 찾아서 : 8화] 다중역할과 3인분의 돌봄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유치원, 그리고 학교로 자신의 삶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나 역시 일에서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갔다. 두 군데 상담센터에서 시간제 상담사로 일했고,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땐 심리학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나는 석사과정 때의 연구를 이어가기 위해 서울의 모교를 택했다. 이는 매주 대구-서울을 왕복해야 함을 의미했다. 다행히 잘 갖춰진 방과 후 교실과 사교육 시스템 덕에 주 1회는 서울에 다녀올 수 있었다.


 가정 밖 세상에서 나의 자리를 넓혀가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깥에서 할 일이 많아져도 집에서의 나의 일은 전혀 줄지 않았다. 나는 1인 4역(엄마·아내·상담사·대학원생)을 맡으며 가정에서 3인분(나·남편·아들)의 살림을 홀로 책임지는 생활을 유지했다. 나의 하루는 대체로 이렇게 흘러갔다.

다중역할 엄마의 하루

 새벽 5시. 식구들이 깨지 않게 슬그머니 침대를 빠져나온다. 쌀을 불려 놓고, 찬물로 세수를 해 남아 있는 잠 기운을 쫓아버린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대학원생 모드를 가동한다. 오롯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이 새벽이 내겐 무척 소중하다.

 오전 6시 50분 알람이 울린다. 공부를 중단하고 식구들의 아침을 준비해야 할 때다. 불린 쌀을 씻어 밥통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른다. 밥이 되는 사이 나는 얼른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화장을 하며 출근 준비를 마친다.
                                                                                       

엄마는 밥을 하고 아이를 챙기며 자신의 출근 준비를 한다. 하지만, 아빠는 자신의 몸만 챙기고 출근하면 그만이다. KBS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내 딸>의 한 장면 @KBS


 이제 식구들을 깨울 차례다. "다들 일어나세요! 아침이야 아침." 불을 켜고 창문을 연 뒤 남편의 출근 옷을 꺼내 둔다. 와이셔츠, 재킷, 바지, 양말까지 잘 보이게 올려놓는다. '자기 옷도 못 챙겨 입나?' 한숨이 나곤 하지만, "양말 어딨어?"라는 남편의 짜증 섞인 물음이 들려오는 것보다는 낫다.


 남편과 아들을 깨우는 사이 주방을 오가며 가스 불에 올려 둔 국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이 시간표를 확인해 아이의 옷도 꺼내 놓는다. "7시 20분이야! 10분 후에 밥 먹는다!" 아직도 이불속에 있는 두 남자를 다시 깨우고 주방으로 가 식탁을 차린다. 남편과 아들은 그제야 세수를 하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그리곤 숟가락만 내려놓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시계를 보니 7시 55분. 8시 5분엔 나 역시 차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먹던 음식들을 대충 정리해 설거지통에 넣고 집을 나선다. 차에 시동을 걸자, 안도감이 밀려온다. 휴~ 오늘 출근도 성공이다. 일터에서는 상담자로서 1인분의 역할만 하면 되기에 오히려 평화롭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아침에 쌓아뒀던 설거지를 하고, 아이의 준비물을 함께 챙기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밀린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린다. 가끔 남편이 늦게 퇴근하면, 저녁 식사를 두 번 차리기도 한다. 밤 10시쯤에야 소파에 앉을 짬이 난다.


죄책감을 부추기는 반응들


 이렇게 종종거리며 지내는 내게 시가 식구들은 "네가 하고 싶어서 한다지만, 너무 힘들게 일하진 말거라", "아비도 바쁜데 너까지 바쁘고 힘들어서 어째"라며 나를 걱정해주는 건지 아닌지 모를 충고들을 건네 왔다. 이웃들 역시 한 마디씩 거들었다. "자기 진짜 대단하다." "편히 살지를 못해" "왜 사서 고생하고 그래~"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말은 따로 있었다.

"엄마가 둘째를 낳아야지. 혼자 크면 나중에 외로워. 애를 생각해야지. 지금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야. 더 늦기 전에 둘째부터 만들어."


 나는 이런 말들을 친척은 물론, 동네 어르신,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이웃, 심지어 택시기사님께도 들어야 했다. 남편과 나는 매번 웃으며 넘겼지만, 둘째도 안 낳는 '이기적인 부모'라는 비난이 등 뒤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실 임신이 두려웠다. 이제야 나의 사회적 자아를 찾아가고 있는데 또다시 가정에서 아이하고만 지내게 되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마음이 컸기에, 둘째를 언급하는 말들은 자꾸만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유발했다. 비슷한 시기에 첫 아이를 출산한 내 친구들 역시 이런 고민을 했고, 그중 몇 명은 둘째를 낳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둘째를 낳고 나니 이제야 인생의 숙제를 끝낸 것 같아"라고 말했다. 하지만, 둘째를 낳은 친구 중 절반은 일을 그만두고야 말았다.


  아이가 12살이 된 지금도 나는 종종 '왜 둘째를 안 낳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답한다. 동생을 만들어 주는 것이 엄마의 의무인 법은 없다고. 엄마도 자기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말이다.

가끔은 이런 우려도 든다. 만일 둘째를 낳으라는 말을 들은 누군가가 아이를 안 낳는 게 아니라 못 낳는 거라면, 큰 상처가 되지 않을까. 아이를 낳는 것은 외부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진정으로 나를 힘들게 한 것

'3인분'의 돌봄을 수행했던 집보다 1인분의 상담자 역할만 해도 되는 일터가 내겐 더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unsplash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를 힘들게 했던 건 1인 4역의 다중역할 자체가 아니었다. 사실 심리학적 측면에서 다중역할은 여러 가지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다중역할은 한 사람의 자아 범주를 넓혀줘 삶을 보다 풍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또한, 한 역할에서 실패나 좌절을 겪을 때, 잘 기능하고 있는 다른 역할이 완충작용을 해준다. 한 영역에서 어려움을 겪더라도, 다른 영역에서 경험하는 기쁨으로 쉽게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힘을 낼 수 있다.


 나의 일과 양육 역시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역할과 일에서의 내 역할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저자 스테퍼니 스탈이 적었듯, 둘은 서로 다른 종류의 욕구에 부응하는 것이고, 어느 한쪽의 욕구는 다른 한쪽의 욕구를 대신해 줄 수 없다.


 나는 일에서 얻는 성취와 보람,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지만, 어머니로서 성장해가는 기쁨도 함께 느꼈다. 일에서 좌절을 경험할 때 아이의 존재는 힘이 됐고, 반대로 아이 때문에 속이 쓰릴 때 일에서 얻는 성취는 내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아이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중역할의 고단함 속에서 깨달은 건 일과 양육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진정으로 나를 힘들게 한 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여성들을 '엄마나 아내의 역할'에만 가두려는 사회적 시선이었다. 이런 시선은 내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가부장적 사고의 잔재들을 자꾸만 자극했다. 일과 공부를 통해 기쁨을 찾고자 하는 내 마음에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죄책감은 결국 나를 3인분의 삶으로 이끌었다. 나는 식구들의 식사와 옷가지를 챙기고, 집안일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사회적 자아를 키워가면서도 가부장 사회에서 말하는 '좋은 엄마, 좋은 아내'의 이미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이 함께 꾸려가고 스스로 돌봐야 할 부분까지 대신해주는 '3인분의 돌봄'을 계속할수록 내 안에는 억울함과 짜증만 늘어갔다. 남편과 아이는 스스로를 돌보는 능력을 점점 더 상실해갔다. 가족의 이런 모습이 건강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칠 뿐이었다.


 이런 일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우리 가족의 삶을 크게 변화시킬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편이 직장에서 캐나다 연수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낯선 곳에서의 삶을 준비하면서 꾹꾹 눌러 담아 두었던 근본적인 문제들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다음회에 이어집니다. 연재는 2주 간격으로 업데이트 됩니다.

*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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