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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Sep 11. 2019

"너도 나만큼 벌어보든지"
남편의 말이 의미하는 것

[엄마의 이름을 찾아서 : 9화] 돌봄의 가치는 왜 알아주지 않나요?

 남편의 캐나다 연수가 결정되었던 2016년 겨울. 나는 막 박사과정 첫 학기를 마쳐가고 있었다. 모처럼 시작한 공부에 재미가 붙어가고 있었고, 소논문 하나를 얼른 써내고 싶은 욕심도 생기던 때였다. 상담자로서의 일에도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연수가 결정되자 나는 이런 마음들을 스스로 자제하기 시작했다. 


 대신 캐나다에 가야 하는 이유들을 자꾸만 만들어 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아이가 영어를 배우기에 최적인 시기라는 점, 남편의 경력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라는 점, 사춘기가 오기 전에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여행할 수 있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좋은 점들이 떠올랐다. 가족들의 중요한 시기를 뒷바라지하는 게 아내와 엄마로서 당연한 일이라 여겨졌다. 학위과정쯤이야 휴학하면 되고, 상담자로서의 일자리도 돌아와서 다시 구하면 될 일이었다. 


 너도 나만큼 벌어보든지

     

 당연한 것이겠지만, 해외로 이사하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비자는 물론 아이의 취학과 남편의 취업을 위한 각종 서류, 우리 집 막내 강아지의 동반출국 서류까지 서류 준비만 해도 몇 달이 걸렸다. 그 사이사이 살던 집을 내놓고, 이삿짐을 싸느라 정신없이 몇 달이 흘렀다. 이런 준비들을 하느라 나는 2017년 봄 학기 대학원에서는 간신히 수업만 듣고 있었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상담자로서의 자리도 조금씩 줄여갔다. 


 남편 역시 이곳에서의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바빴지만 직장동료 및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며 사회적 관계를 가꾸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한 동안 못 만날 동료들과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남편은 더 많은 모임을 가졌고 거의 매일 밤 술에 취해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초등학교 3학년 아이를 놔두고, 내가 친구나 지인과 모임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출국을 3주 정도 앞둔 어느 날. 역시 밤늦도록 동료들과 술자리를 가지고 귀가한 남편에게 나는 슬쩍 한마디 건넸다. 


 “나도 약속 좀 잡자. 매번 당신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으니까 나는 누굴 만날 수가 없잖아. 나도 사람들하고 인사하고 가고 싶어. 내게도 사회생활이 있고 사회적 관계가 있다고. 약속 잡기 전에 나랑 스케줄 조율부터 하면 안 돼?”


 그러자 술기운에 취한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너도 나만큼 벌어보든지.”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남편이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내 일과 공부를 지지해주는 동반자라고 느꼈던 그의 속마음이 이랬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동시에 분노가 치솟았다. 수입이 적다는 이유로 내 일을 폄하하는 것에 화가 났고, 그동안 내가 제공한 가사노동과 돌봄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배신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화는 나는데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내가 남편보다 돈을 못 버는 것은 분명했고, 심지어 나는 돈을 쓰며 대학원에까지 다니고 있었다. 남편이 앞세우는 경제논리 앞에 나는 분노조차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억울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은 '얼마만큼 돈을 버는지'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unspalsh


 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을까 


 그날 밤 나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가 셋인 그 친구는 셋째 아이가 생기자 일과 공부를 모두 그만두고 육아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전화를 걸자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 너무 억울해. 남편 오늘은 회사 안 가는 날인데도 독박 육아야. 오늘 또 골프 간 거 있지? 정말 화는 나는데 이상하게 아무 말도 못 하겠어. 남편만 돈을 벌어서 그런지. 돈 벌어서 우리 이만큼 살게 해 주고 자기가 번 돈으로 골프 가는데 그것도 못하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거 있지?” 


 그 친구도 나와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날 친구와 나는 서로의 억울함에 공감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남편이 내게 던진 말은 단지 남편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전제임을 말이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뤄온 한국사회는 여전히 돌봄보다 경쟁, 생명존중보다 성취가 중요한 사회다. 어린 시절부터 경쟁과 성취 지향적 사고를 주입받아온 우리들은 흔히 일과 사람의 가치를 ‘얼마만큼의 돈을 버는지’로 따지는데 매우 익숙해져 있다. 때문에 남편은 경제적 능력이 우월한 자신이 나보다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게 당연하다 여겼을 것이다. 내 친구의 남편 역시 ‘돈을 벌기 때문에’ 아이 셋과의 고군분투는 아내의 몫으로만 남겨두었던 게 아닐까.


 나와 내 친구도 이런 경쟁과 성취지향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 역시 이런 논리에 길들여져 있음을 의미했다. 남편이 경제적인 몫을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이런 대접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인 우리도 이런 상황의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돌봄은 인정받지 못하게 됐을까

     

돌봄이 가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회 전반에서 저평가되어 있다. @unspalsh


 나는 참으로 궁금했다. 어쩌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돈의 논리로만 생각하게 된 것인지, 왜 돌봄이 이토록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받게 됐는지 말이다. 사실, 이 질문에는 아직도 만족스러운 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근 읽은 책들에서 그 실마리를 조금은 풀 수 있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부키, 2017)에서 카트리네 마르살은 시장경제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저녁 식탁이 차려질 때까지의 과정을 예로 들어 시장경제의 개념을 이야기한다. 그는 재료 생산부터, 판매까지 상인들이 각자의 이득을 추구했기 때문에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카트리네 마르살은 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을 빠트렸다고 지적한다. 상인들이 일하러 갈 수 있도록 그들을 돌보고, 그들의 아이들을 돌 본 사람들의 노고, 그리고 저녁밥상을 차려주는 어머니의 노고는 완전히 제외되어 있다고 말이다. 


 정말 그랬다. 일을 하고 돈을 벌어오려면 그를 돌보고, 그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양육하며 가정을 운영할 누군가의 보살핌이 반드시 필요하다. 남편이 경제적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도 가정에서 전적으로 돌보는 자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내 친구의 남편이 돈을 벌 수 있었던 것도 내 친구가 자신의 삶을 양보하고 아이 셋과 살림을 책임지고 있기에 가능했다. 우리의 돌봄이 없었다면 남편들이 지금과 같은 경제적 능력을 가지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시장경제의 시작부터 외면된 돌봄의 가치는 여전히 무시되고 있었다.


 만일 돌봄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어 왔다면 어땠을까. 사회 유지의 근간이 되는 생명을 키워내고 보살피는 돌봄의 가치는 재화를 벌어들이는 다른 노동의 가치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진작에 돌봄의 가치를 알아채고 높이 평가해줬다면, 아마도 돌봄이 여성의 몫으로만 남겨지지도,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낮아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성들이 돌봄의 영역에서 함께하고, 가사에 참여하는 것 역시 보다 자연스러워졌을 테다. 때문에 <슈퍼우먼은 없다>(새잎, 2017)의 저자 앤 마리 슬로터는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진정한 평등으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남편은 그 다음날 아침 곧바로 내게 사과를 했다. 그는 “술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게 더 문제라고 느꼈다. 취중진담이라는 말도 있듯이, 술김에 나온 말은 무의식 속 깊은 진실을 담고 있는 법이다. 남편의 의식은 ‘이건 아내를 무시하는 잘못된 태도야’라고 말하고 있었겠지만, 무의식과 이 사회에 깊이 배인 사고방식은 쉽게 변하지 않을 터였다. 내가 느끼는 남편과의 심리적 거리는 우리가 서로를 잘 모르던 때보다도 더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멀어진 채로, 우리 가족은 2017년 초여름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그리고 돌봄과 생명존중의 가치가 경쟁과 성취에 크게 밀리지 않는 세상을 경험했다. 한국과는 너무 다른 그곳의 삶 속에서 멀어진 우리의 거리는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 연재는 2주 간격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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