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이름을 찾아서 : 10화] 나를 비춰준 캐나다 이웃들
2017년 여름. 우리 가족은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밴쿠버 공항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건 비현실적으로 파랗고 깨끗한 하늘,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상쾌한 밴쿠버의 공기와 달리 당시 내 마음은 복잡하고 무겁기만 했다.
캐나다에서 나는 ‘전업주부’였다. 이곳에서 일할 직장이 있는 남편은 ‘워킹비자’, 다닐 학교가 있는 아이는 ‘학생비자’를 받았지만, 내게는 ‘동반비자’가 발급됐다. ‘동반비자’는 말 그대로 가족과 동반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독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남편과 아이를 뒷바라지하는 존재로서 캐나다에 거주할 자격을 얻은 셈이었다.
일과 공부에서 삶의 생기를 느껴왔던 내게 엄마와 아내로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한국의 친구들은 외국생활을 경험하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내게 밴쿠버로의 이사는 대구로 이사했던 때를 상기시켰다. 게다가 남편과의 정서적 거리도 그 어느 때보다 멀어진 상태였다. 나는 또다시 결혼 후 나 자신을 잃고 힘들어했던 때로 돌아갈까 봐 겁이 났다.
‘나답게’ 살 수 있는 전업주부
다행히 처음 몇 주간은 낯선 곳에서의 삶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렌트한 작은 콘도(밴쿠버식 아파트)가 살림집의 모양새를 다 갖추고 나자 다시금 불안감이 밀려왔다. 나는 이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도서관에서 페미니즘 책들을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모든 재료를 직접 손질해 세 끼를 해 먹는 일이 무척 벅차게만 느껴졌다. 식재료는 싸지만 외식비는 비싼 밴쿠버는 도시락 문화가 매우 발달돼 있었다. 아이의 학교에서도 급식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남편과 아이 모두 점심 도시락을 매일 싸가지고 다녔다. 한국에서부터 계속해 온 ‘3인분의 삶’과 완전히 다른 취향을 담은 2개의 도시락 준비로 나의 아침은 늘 분주하고 정신없이 지나갔다.
어느 날. 나는 한 이웃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부모님 세대 때 이곳에 정착한 그 이웃은 이미 이곳의 문화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하소연했다.
“한국은 급식하잖아요. 전 도시락을 싸 본 적이 없어서 아침마다 도시락 싸는 게 너무 스트레스예요. 아이에다 남편까지 하루에 두 개 싸는데 아이는 빵을 싫어해서 김밥이나 볶음밥을 싸가고, 남편은 한국음식 냄새가 너무 튄다며 샌드위치를 싸 달라고 한다니까요.”
그러자 이웃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도시락을 남편 것까지 싸줘요? 저희는 아침식사 준비는 제가 하지만, 남편이 출근 준비하면서 간단하게 샌드위치 같은 걸로 아이 도시락이랑 본인 도시락을 챙겨요.”
나는 되물었다. “직장 안 다니시잖아요?”
“직장 안 다니는 거랑 남편 도시락 싸주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낮 시간엔 저는 집에서, 아이는 학교에서, 남편은 직장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면서 지내지만, 다 같이 집에 있을 땐 각자 자신의 몫을 해야죠. 남편은 성인이니 스스로 도시락 싸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엄마나 아내로서 가족들을 보살피는 게 제 일이지만, 저도 제 삶이 있어요. 가족들을 대신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까지 제가 해줄 필요는 없죠.”
그랬다. 이곳의 이웃들은 전업주부여도 가정에서 나처럼 다른 식구들의 몫까지 해내지 않았다. 낮 동안 청소나 빨래, 장보기, 아이의 학교생활 참여 등 돌봄을 담당했지만, 저녁엔 온 가족이 함께 식사 준비를 하고, 치우고, 함께 쉬었다. 이들은 ‘돈을 벌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안해하지도, 스스로의 삶을 제한하지도 않았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1인분의 삶을 살았기에 가정에서 살림을 맡은 전업주부도 당당하게 자신을 위한 취미생활을 하거나 봉사활동 등을 하며 자신만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무시당하지 않는 돌봄과 생명의 가치
나는 궁금했다. 어떻게 캐나다 엄마들은 전업주부로 살면서도 ‘나답다’ 느낄 수 있을까? 돈을 벌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이런 의문을 품고 이웃들의 삶을 관찰하자, 어렴풋이나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도 경쟁을 통한 성취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캐나다인들은 그에 못지않게 생명존중과 돌봄을 소중히 여겼다.
먼저, 이들은 습관처럼 남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았다. 밴쿠버의 학교에서는 성적표에 다른 또래들과 비교한 아이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한 학기 동안 아이가 얼마만큼 발전했는지를 적어준다. 즉, 다른 사람과 경쟁해 이기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만족하고 성장하는데 더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육 환경 덕분인지 학력이나 직업, 버는 돈에 따라 사람을 줄 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직종과 관계없이 자신이 선택한 일에서 만족하고 살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또한 생명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동물 주의 선언>의 코리 페뤼숑이 적었듯,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회가 사람을 대하는 관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내가 살던 곳의 상점들은 매일 아침이면 작은 그릇에 물을 담아 문 밖에 내어 두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반려동물과 야생동물들을 위한 배려였다. 또한, 캐나다거위 떼가 길을 건널 때, 갈매기가 도로 한 복판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을 때, 우리 동네의 차들은 조용히 멈춰 서서 그들을 기다려주었다. 도시가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 인식하고 있었고, 다양한 생명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기 위해 애썼다.
‘돌봄’이 전제된 사회
경쟁에서 이겨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유일한 가치가 아닌 데다 다양한 삶의 방식과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에서 돌봄은 한국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이곳에서 돌봄은 사람들의 일상을 지원하고, 생명을 가꾸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자원이었다. 때문에 각 가정에서 돌봄을 담당하는 전업주부들이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눅 드는 일은 없었다.
또한, 직장문화도 직원들의 가정에 ‘돌볼 가족’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형성되어 있었다. 남편이 일하던 연구소에서는 가족이 아프거나,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거나 해야 하는 일이 갑자기 발생했을 땐 언제든지 전화 한 통으로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다. 아기 엄마였던 남편의 동료는 일주일에 두 번만 출근하고 다른 날은 재택근무를 했고, 또 다른 동료가 어린 강아지를 입양했을 땐, 한 동안 강아지와 함께 출근하기도 했다.
남성들이 돌봄에 함께 하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아내가 있어도 남편들은 자신의 빨래나 식사 등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때문에 이곳의 직장 맘들은 과다한 가사노동에 시달리지 않았고, 회사와 가정에 괜한 미안함을 갖지도 않았다.
나는 캐나다의 이웃들에게 나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일하고 공부한다는 이유로 식구들에게 늘 미안해했던 나. 전업 주부의 자리에 있을 때마다 나 자신을 잃은 채 우울해했던 내가 보였다. 이런 나 자신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더 이상 안쓰럽게 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자리에 있든, ‘나답다’는 느낌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이런 마음이 커져가고 있을 무렵, 나는 우연히 거리의 홍보부스에서 ‘다문화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 기반 무료 집단상담’ 안내 책자를 발견했다. 서툰 영어가 큰 제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뭐에 홀린 듯 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진정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덧) 캐나다는 무척 넓은 나라이고, 지역마다 분위기가 다릅니다. 묘사한 캐나다인들의 모습은 제가 살았던 진보적인 도시 밴쿠버, 그중에서도 제가 살고 있던 지역에 살았던 이웃들의 모습임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한국에서 살던 제겐 캐나다 이웃들의 삶이 무척 이상적으로 보였지만, 캐나다가 젠더 불평등을 해소한 이상적인 사회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