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이름을 찾아서 : 1화] 당신에게 일은 무엇인가요?
2005년 이른 가을쯤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한 지 1년 남짓. 나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는 당연한 수순으로 프러포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저녁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 나는 서울 흑석동의 골목길을 걸었다.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작은 공원에 도착했다. 벤치 하나 달랑 있는 아주 작은 공원이었지만, 서울의 야경을 가득 품은 그곳에서 나는 프러포즈를 받았다. 그렇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결혼 절차가 시작됐다.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 있던 28살의 내게 결혼은 우리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직장과 나의 친정집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덕분에 남편은 자연스럽게 우리 식구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당시 자취하던 남편은 출근 전 종종 우리 집에 들러 아침 식사를 하곤 했다. 새벽마다 아침식사를 차려주던 친정엄마는 이미 남편을 사위로 대하고 있는 참이었다. 나만 남편의 가족들에게 합격점을 받으면 될 일이었다. 프러포즈를 받고 한 달 뒤쯤인 어느 토요일. 대전에 살고 계신 남편의 부모님과 첫 만남 날짜가 잡혔다.
나의 취향을 포기하다
날을 잡아 놓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고기 먹기 연습’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채식주의자로 살아왔다. 4학년 때 학교에서 현장학습 차 방문했던 독립기념관에서 참혹한 고문 장면들을 보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그 날 이후 핏빛 고기는 내게 잔혹함을 떠오르게 했다. 친정엄마 말로는 독립기념관에 다녀오고 나서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고기를 끊었다고 한다. 그 후 환경문제, 동물권과 관련된 문제들을 인식하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채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나의 소신을 아는 남편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 날 고기 집에 가신다는데 어떡하지? 아버님은 편식을 아주 싫어하셔. 채식도 편식이라 생각하실걸?” 나는 불안해졌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고기 집에 가서 양념이 듬뿍 배인 갈비를 아주 조금 넣고, 야채는 잔뜩 넣어서 쌈을 크게 만들어 먹어보았다. 고기를 매우 잘 먹는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다행히 역겹지는 않았다.
그때 난 왜 “저는 채식주의자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밝힐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어떻게 아무도 직접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시부모님의 취향을 무조건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돌이키면 나는 결혼도 하기 전부터 이미 가부장적 사회문화에 순응했던 것 같다. 나는 딸만 둘인 집에서 일하는 엄마와 함께 살아왔다. 우리 집에선 ‘딸’도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각자의 취향을 존중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가부장적 문화는 그렇게 내 안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내 안의 가부장’은 나도 모르는 새에 스스로에 대한 존중을 내려놓게 했다. 당시 내겐 나의 취향과 신념보다 ‘예비 시부모님의 평가’가 더 중요했다.
친정엄마의 일
드디어 그 날이 왔다. 며칠 전부터 의상을 코디해 두고, 새벽부터 머리를 손질하느라 분주했던 기억이 난다. 잔뜩 긴장하긴 했지만, 서른 전에 결혼하는 것을 하나의 성취라고 여겼던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남편의 가족들을 만났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모두 반갑고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화기애애하게 오갔고, 긴장도 조금은 풀어졌다. 그러다 시아버지는 내게 부모님의 직업을 물으셨다.
"아버지는 작게 자영업을 하시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답하셨다.
"아버님 벌이가 시원치 않은 모양이구나"
나는 이 말에 당황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공손한 며느리 감으로 보일만한 적절한 대답을 찾느라 안간힘을 썼다. 못 먹는 고기를 먹고, 무슨 말에도 웃어 보이며, 나답지 않게 어른들과 스킨십까지 하며 다정함을 과시했던 그 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어른들이 나를 예뻐하시는 거 같다며 결혼 날짜만 잡으면 된다고 행복해했다. 그런데 나는 어딘지 자꾸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시댁 어른들에게 점수를 깎인 것도 아닌데,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왠지,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았다. 내가 나답지 않다는 느낌은 무척이나 불편했다. 그리고 “아버지 벌이가 시원치 않은가 보구나”라는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사실, 친정아버지의 벌이가 시원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은 대부분 좋지 않게 끝이 났기 때문에 어머니가 집안의 경제적 부분까지 도맡으셨던 것도 맞다. 그런데 만일 아버지의 벌이가 좋았다면 어머니가 교사직을 그만두셨을까? 그건 절대 아니었다. 어머니는 교사를 천직으로 여기신 분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교실에서 생활하는 것이 진짜 교사라며 평생을 평교사만 하셨을 만큼 교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두 분 사이가 멀어지고, 경제적으로 힘들 때에도 어머니는 교사로서 일을 하며 힘을 내셨다. 말썽쟁이 꼬맹이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찾으셨고, 성인이 되어 찾아오는 제자들은 어머니에겐 큰 기쁨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성공한 사업가였어도 절대로 교사로서의 정체감을 포기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일의 의미
이런 어머니를 둔 내게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일의 경제적 의미 역시 중요했지만, 내게 일은 세상과 연결되고, 가치를 실현하며, 삶의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본보기가 되어주었고, 어머니의 자매들인 이모들 모두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나는 결혼하고 남편이 잘 벌어오면 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를 실현하고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그리고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사전적 의미에서도 그렇다. 사전적인 일의 의미는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네이버 국어사전)’이다. 어느 곳에도 생계만을 위한 것이 일이라는 설명은 없다.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자신의 꿈이나 가치일 수도 있다. ‘적절한 대가’란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을 통해 얻게 되는 성취감과 보람,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전공분야인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진로발달이론을 정립한 도날드 슈퍼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 이미지와 일치하는 직업을 선택’한다며 ‘직업은 생애발달과정에서 만나는 다양한 역할 중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심리학에서 직업 혹은 일은 생계유지 수단을 넘어 한 개인의 심리적 성숙과 자아실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하지만, 나의 시댁에서 단지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이었다. 특히, 여성에게 일이란 남편이 잘 벌지 못해 생계를 유지해야 할 때만 필요한 것이었다. 관점의 차이가 첫 만남부터 명확했지만, 이때 당시 나는 낭만적 사랑에 푹 빠진 상태였다. 이 날 느꼈던 찜찜한 기분은 결혼 날짜를 정하고, 청첩장을 만들고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 설렘 속으로 사라져 갔다.
결혼한 여자의 일
그러던 다음 해 봄. 드디어 청첩장이 나왔다. 당시 나는 다니던 신문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후, 한 영화주간지에서 취재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청첩장을 모든 회사의 직원들에게 직접 한 장씩 드리며 인사를 건넸다. 사람들은 축하 인사와 함께 “우리 회사에 결혼한 여기자 1호가 탄생한다”며 신기해했다. 여성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회사인데 결혼한 여기자가 없다니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반면, 팀장 이상의 자리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던 남자 기자들은 대부분 결혼하고 아이까지 두고 있었다. 나의 직속상관이었던 팀장님께도 청첩장을 드렸다. 그러자 이런 인사말이 돌아왔다.
“결혼한 여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한 걸?”
‘도대체 결혼하고 일하는 게 무슨 상관인데 이런 반응인 거지? 왜 결혼한 여기자는 하나도 없는 거지?’
청첩장을 다 돌리고 난 후 내 머릿속엔 커다란 물음표가 새겨졌다. 하지만, 물음표만 그려 놓았을 뿐 마음엔 그저 결혼식을 잘 치르고, 시댁에서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래서 난 내가 만든 영화잡지를 예비 시댁으로 정기배송해드렸다. 시부모님이 내가 쓴 글들을 읽으면서 나의 일을 존중해주고, 가끔은 자랑스러워하시리라 믿었다. 나의 부모님이 남편의 일을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는 상태에서 이런 바람은 실현될 수 없었다. 또한, 머릿속에 그려진 물음표가 현실이 되는데 까지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