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뒷바라지만 잘하면 행복하다고요?

[엄마의 이름을 찾아서 : 2화] 일을 그만두다, 분열이 시작되다

by 주연

2006년 5월 7일. 그야말로 환상적인 날씨였다. 전 날 시원하게 내린 비 덕분에 그 해 유난히 심했던 황사도 사라지고, 온 세상이 깨끗해졌다. 맑고 파란 하늘 아래 5월의 생기를 느끼면서 우리는 혼인서약을 했고, 마침내 부부가 됐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결혼식 도중 많은 신부들이 눈물을 흘리건만, 나는 결혼식 내내 싱글벙글했다. 결혼은 내게 하나의 성취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결혼식을 마친 후 인천공항 근처의 한 호텔로 향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신혼여행지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예정이었다. 결혼식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아늑한 방에 남편과 둘이 남게 되었을 때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내가 결혼을 했다는 현실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친정 부모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시는 ‘오롯한 나’로서 살던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묘한 단절감을 느끼면서 한바탕 서럽게 눈물을 쏟아내고, 신혼 여행길에 올렸다. 다행히 여행의 낭만과 흥분은 이런 기분을 씻어주었다.


오래된 고민을 꺼내 들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새롭고도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가정에서는 아내와 며느리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일에서는 예전의 것들을 유지했다. 남편은 그의 일에서 최선을 다했고, 나 역시 취재기자로 계속 일을 했다. 일이 있었기에 가정에서의 낯선 역할 속에서도 과거와 현재의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결혼을 준비하느라 잠시 밀어두었던 고민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기자라는 일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쓰는 글이 특정 영화나 배우를 홍보해주는 것 외에 사회에 어떤 보탬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글쓰기’를 하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은 7년이라는 기자생활 동안 점점 더 현실과 멀어지기만 했다.


영화담당기자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나는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이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름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영화 자체보다는 등장인물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즐거웠다. 때문에 등장인물의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며 글을 쓰곤 했다. 나의 관점은 회사의 편집관과 종종 부딪혔다. 이런 갈등 속에서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간절해져 갔다.


게다가 당시 나는 새로 부여된 아내로서의 역할에 헌신하고 있었다. 취재원들과의 만남보다 일찍 퇴근한 남편의 저녁밥을 차려주는 것이 더 중요했고, 주말에 현장에 나갈 일이 생기면 남편 홀로 둔다는 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당연히 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나와 단절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상담심리학’이라는 분야를 알게 되었다. 이 공부를 하면 내가 영화를 보면서 그토록 분석하고 싶었던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원에 진학해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수련을 받아 상담심리사 자격증을 따면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음도 알게 됐다. 야근이나 회식이 없고, 근무환경이 유연한 편이라 훗날 아이가 생겼을 때 육아와 병행하기 쉽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결국 난 남편과 상의 후에, 중학교 때부터 꿈꿔온 기자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한 달쯤 휴직을 하면서 심사숙고한 뒤 2007년 2월 말. 나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당시 나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상담’을 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때문에 기자직을 접은 것에 대한 아쉬움도, 새로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표를 냈을 때 나의 이런 결심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회사 동료들의 반응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기자직을 그만두는 것이었지만, 결국 결혼 전 들었던 “결혼한 여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해”라는 말에 담긴 편견을 확인시켜 준 셈이었다. 이렇게 나는 결혼 10개월 만에 일에서도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제 결혼하기 전의 나와는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아내.jpg 결혼 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가부장적 성역할을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인 여성이 되어 갔다. @pixabay


‘부수적 존재’라는 느낌


회사에 사표를 낸 후 그 해 가을학기 입학을 목표로 곧바로 대학원 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학부 때 전공과 완전히 다른 것을 공부해야 했기에, 나는 스터디 모임에 참여했고, 같은 길을 꿈꾸는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시험 준비를 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댁에 방문했을 때, 나는 시댁 어른들께 나의 꿈을 이야기했다.


“아버님, 저 일 그만뒀어요. 대학원에 진학해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해보고 싶어서요.”

그러자 시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너는 내 아들 뒷바라지만 잘하면 행복하다”


나는 왜 일을 그만두었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지 설명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시부모님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으셨다. 분명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아마 그 부분은 못 들으신 것 같았다. ‘내 아들 뒷바라지만 잘하면 행복하다’ 이 한 마디로 나의 꿈은 일축되었다.


시아버지의 이 말씀은 내게 일종의 깨달음을 가져왔다. 결혼 후 아니 결혼 전부터 시댁에 갈 때마다 밀려왔던 불편한 기분의 이유가 명확해졌다. 시부모님들은 내게 무척 잘 대해주셨다. 요리나 설거지를 제대로 못해도 야단치지 않으셨고, 과일을 어설프게 깎아도 새 아가가 깎은 과일은 더 맛있다며 예뻐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시댁 식구들과 만날 때마다 어딘지 작아지고 초라해짐을 느꼈었다.


‘예뻐해 주시는 시부모님’과 ‘불편한 기분’ 사이의 불일치의 원인은 바로 이거였다. 시댁에서 나는 ‘남편 뒷바라지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한 사람’이 아닌 ‘남편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었기에 시부모님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편하기만 했던 것이다. 보부아르가 1949년 <제2의 성>에 적었던 그 유명한 말이 2007년의 내게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참고로 하여 정의되고 구별되었지만, 남자는 여자를 참고로 정의되지 않는다. 즉 여자는 부수적 존재다'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재인용)


자발적 헌신 vs 가부장적 의존


또한 이 말은 아내로서의 헌신을 돌아보게 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차리고, 남편의 출근 준비를 돕는 것, 남편이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저녁 약속을 모두 마다하고 장을 봐 식사를 준비하는 것, 스터디 모임에 나가 늦게 돌아올 때마다 남편에게 미안해했던 일. 이런 일들이 과연 아내로서 사랑의 표현인 것인지, ‘남편을 뒷바라지해야 하는 존재’라는 규정에 스스로를 가둔 채 하고 있는 일인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신혼이었던 당시 내가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나의 모습 속엔 자발적 헌신 외에 다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대학원 입시 준비를 하고 있긴 했지만, 일을 그만두고 집에 머물게 되자 나는 나 자신보다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공부하는 시간 외의 대부분 시간을 남편의 옷을 손질하거나, 그를 위한 식사를 준비하는데 썼다. 남편이 내가 기울인 정성에 화답할 때면 행복했지만, 갑작스러운 회식이나 모임으로 알아주지 않을 때면 무척이나 서운해했다. 나는 나의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가기보다 남편의 반응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이런 것들을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부장 사회의 성역할을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인 여성이 되어갔다.


나는 이렇게 분열되기 시작했다. 결혼 전엔 일에서의 단단한 정체감을 중심으로 어느 자리에서든 스스로가 ‘나답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 후 나의 정체감은 갈라졌다. 시댁에서 나는 온전한 한 사람이 아닌 남편에 의해 규정되는 ‘부수적 존재’였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자발적 헌신’과 ‘가부장적 의존’ 사이를 오가며 헤매고 있었다. 이전까지 나를 규정했던 ‘기자’라는 강력한 정체감도 사라졌다.


이런 혼란을 겪는 와중에 나는 대학원 입학을 위한 공부에 매진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상담심리사가 되면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새로운 일에서 성공해 시댁에 내가 ‘부수적 존재’가 아니라 꿈을 가진 한 사람임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2007년 9월 원하던 대학원에 합격했다. 그리고 임신을 했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됐습니다. 연재는 격주로 업데이트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엄마가 일하는 건, 아빠가 돈을 못 벌기 때문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