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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Feb 25. 2020

저는 지금 대구에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 가 바꾼 나의 일상 

 아이의 봄방학을 맞아 안동에 휴가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원래는 대만으로 가족여행을 갈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 항공 수수료와 호텔 숙박비를 물어내고 여행을 취소한 터였다. 하지만, 이미 잡아 놓은 휴가를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북적이는 관광지 대신, 안동의 조용한 시골 마을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펜션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시금 활기찬 일상을 시작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대구에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읽었다. “대구에도 확진자 나왔다는데?” 나는 운전 중인 남편에게 알렸고 우리는 “사태가 수그러들지를 않네”라며 걱정되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딱 그만큼 이었다. 이미 한 달 가까이 지속된 코로나 사태인데 뭐 그렇게 달라질 것이 있나 싶었다. 아이는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학원으로 갔다. 우리는 집으로 왔고 아무렇지도 않게 짐 정리를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시간 후 우리의 일상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3시간 후, 일상이 멈춰서다


 학원이 마칠무렵, 아이를 데리러 가려 할 때였다. 학원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어머니 혹시 출발하셨나요? 지금 차로 여기 오실 수가 없어요. 저희가 데려다 드릴테니 출발하지 마세요. 저희 학원 바로 옆 병원에서 확진자가 나와서 지금 여기 다 통제됐어요.”     


 가슴이 철렁했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119차에서 내려서 병원 사람들을 실어서 차로 옮겼고, 도로가 일부 차단되었다고 알려줬다. 학원서 마스크를 한 차례도 벗지 않았고 손 소독도 여러 차례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더니 연이어 문자메시지들이 왔다. 아이가 다니는 다른 두 군데의 학원에서도 모두 ‘임시휴원’한다며 메시지들을 보내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내가 일하는 상담센터들에서도 연락이 왔다. 3월 첫 주까지 모든 상담을 중지한다고, 내담자들에게도 센터에서 연락을 취할테니 출근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지자체에서도 여러 차례 ‘안전 안내 문자’를 보내 집단모임금지, 외출자제, 부득이한 외출시 마스크 착용 등 코로나 대비 생활 수칙을 보내왔다. 저녁엔 3월 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아이들의 개학도 일주일 연기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천주교대구대교구청에서도 3월 5일까지 신자들이 참여하는 모든 미사와 행사를 중단한다고 공지를 해왔다(나는 가톨릭 신자다). 코로나 사태가 한국에 터진 후 성당에선 성수를 치우고, 마스크를 쓴 채 미사를 드려왔었다. 미사를 전면 중지한다니, 마치 ‘전시체제’에 돌입한 듯한 위기감이 몰려왔다.      


 목요일 저녁에 단둘이 만나기로 했던 이웃도 “지금 이 상황에선 안 만나는 게 좋겠다”고 알려왔고, 봄방학 때 한번 모여서 놀자던 아이 친구 엄마들도 “무사히 잘 나고 봅시다”라고 카톡을 보내왔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낀 채 출근은 했지만, 딱 필요한 업무만 하고 귀가했다. 회식도, 회의도 모두 취소됐다.

 

황량한 거리, 마음이 위축되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은 대구에 첫 확진자가 나온 지 하루만에 모두 중지됐다. 우리 가족은 만약에 대비해 되도록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만 생활하기로 했다. 학원에 가지 않는 아이는 모처럼 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기로, 출근을 하지 않게 된 나는 읽고 싶었던 책이나 실컷 읽자고, 휴가라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느 것도 여유롭게 누릴 수 없게 했다.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아이는 지루함에 금세 짜증을 냈다.      


 문제는 우리집 냉장고에 식재료가 얼마 없다는 거였다. 며칠간 여행을 다녀와야 했기에 여행 전 이미 냉장고를 다 비워둔 상태였다. 김치와 몇 가지 야채 외에는 밑반찬 해먹을 재료가 없었다. 나는 온라인으로 장을 보기로 했다. 평소 이용하는 한 대형마트의 온라인쇼핑몰에 들어가 장바구니를 열심히 채웠다. 하지만, 배송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다. 5일치의 배송예약이 모두 마감된 상태였다. 고객센터 픽업서비스라도 신청하려고 했지만, 이 역시 모두 마감된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트 외출마저 꺼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때 친한 이웃에게 문자가 왔다. ‘어제 내가 마트 가보니까 두부, 계란 이런 자주 쓰는 식재료들은 다 나가고 없더라고. 자기도 얼른 사다놔. 라면이라도 쟁여놔야지’ 마치 전시체제에 돌입한 느낌이었다. ‘전 이참에 밥하기도 싫은데 배달음식 골고루 먹어볼까봐요’ 농담반, 진담반 답장을 쳤다. 그랬더니 ‘배달 음식도 위험하지. 그거 만든 사람이 어디 다녀온 사람인지, 신천지인지 알 수 없잖아.’ 라고 답이 돌아왔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불안감이 또 한차례 내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다.     


 결국 나는 남편과 함께 마스크와 손소독젤로 무장을 하고 마트로 향했다. 자동차 창밖으로 스쳐가는 길거리의 풍경이 황량했다. 자동차 통행량도 현저히 줄었고,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마트 주차장도 평소와 달리 한산했고, 직원들은 모두 마스크와 위생장갑을 끼고 손님들을 맞았다. 장보는 사람들 역시 모두가 마스크를 썼고, 일부는 비닐장갑을 끼고 장을 보기도 했다. 맛있는 냄새로 사람들을 유혹했던 시식코너도 모두 중지상태였다. 


 다행히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식재료와 생필품은 모두 있었다. 2~3주는 버틸 수 있을 만큼 넉넉히 장을 보고 돌아왔지만, 삭막한 풍경들은 마음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재난영화의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단 며칠 만에 도시의 풍경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어떤 마음들      


  가뜩이나 위축된 마음은 인터넷으로 코로나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더 움츠러져 왔다. 대구의 코로나19 관련 소식들을 전하는 뉴스에는 종종 이런 댓글이 달렸다. ‘대구 KTX무정차 해라’ ‘대구 봉쇄해야 하는 것 아니냐’. 댓글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대구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민폐 끼치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말에 스키장을 예약해 두었다는 이웃도 “아무래도 가면 안 되겠지? 우리가 어디 가서 대구 사투리 쓰고 다니면 사람들이 꺼림직해 할꺼야” 라며 고민을 털어놨다.      


 대구에서 일을 하지만, 집이 부산이라 주말엔 부산에 가곤 했던 동료도 당분간은 집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아무리 가족들이라고 해도,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며 말이다. 나 역시 ‘민폐’를 끼치지 않고자 2월 말 예정되었던 서울에서의 약속과 행사 참여를 모두 취소한 터였다. 예약했던 서울의 숙박업소에서는 환불 기한이 지났는데도 “대구에서 간다”는 한 마디에 즉시 전액 환불을 해줬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자괴감이 느껴졌다. 

    

지난 2월 23일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활짝 핀 매화. 그 어느때보다 황량한 겨울이지만, 봄은 오고 있다. @송주연 

 

 하지만 늘 어두운 표정으로만 지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가족과 비슷하게 제한된 생활을 하고 있는 대구의 이웃들, 동료들, 친구들과 수시로 나누는 카톡과 전화는 일상의 답답함을 덜어주고 있다. 하루에도 여러차례 ‘우리 팟팅해요’라고 주고받는 격려의 말들은 함께한다는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대구가 아닌 지역에 사는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의 안부 전화도 무척이나 큰 힘이 되고 있다. 1년 넘게 카톡 한 번 안 했던 친구들 몇 명과도 이번 사태로 통화를 하며 다시금 서로의 우정을 확인했고, 치매를 앓고 계신 외할머니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는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걱정해주시고, 안부 물어주시는 분들의 따뜻한 마음 덕에 놀라고 움츠러둔 마음이 조금씩 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며칠 전 놀라운 풍경을 발견했다.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마스크를 쓴 채 반려견과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고 오는 길이었다. 우리 집 앞 매화 나무에 벌써 꽃이 핀 것이 아닌가. 그 어느 때보다 삭막하고 황량한 겨울이었지만, 봄이 오고 있었다. 여전히 위기감이 팽배하지만, 이 겨울이 가고 있듯, 언젠가 코로나19 사태도 지나가질 않겠는가.


 부디 더 큰 아픔 없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이 사태를 이겨낼 수 있기를. 그래서 다가오는 봄엔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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