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리움, 강서경 버들, 북, 꾀꼬리 전
실제라고 받아들이기 힘든, 허구라고 생각되는 순간들. 삶이 내게 판타지 소설을 낭독하듯, 환상을 속삭이는 순간이 있다. 지난해 10월 리움의 강 서경 전시를 방문했을 때가 그러했다.
누구나 아름다운 꿈을 꾼다. 어떤 이는 책을 읽으며, 이야기 속의 무대와 배경을 머릿속에 펼쳐낸다. 그들은 주인공의 감정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한 편의 아름다운 세계를 거닐 수 있다. 또 다른 이는 음악을 들으며, 음악의 멜로디, 구성, 악기의 소리, 보컬의 감정에 자신만의 감성을 얹어 환상의 세계를 따라가기도 한다. 눈을 감고 느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언제든 무한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지치고 상처 입은 마음은 잠시나마 따뜻한 위로를 받는다. 그저 책을 펼치거나, 음악을 재생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숨어들 수 있는 도피처, 그곳이 내겐 미술관이다.
화이트 큐브라 일컬어지는 미술관은 하얗고 네모진 공간인 전시실만을 표현하는 단어다. 전시실은 미술관에서 관람객이 실제로 볼 수 있는 유일하고도 한정적인 부분이다. 그 외에도 미술관에는 소장품을 놓아두는 수장고, 소장품을 관리하고 복원하는 보존처리실, 학예사들이 일하는 공간인 학예실, 교육실, 사무실, 포장·운송 공간, 경비소, 관리사무소 등이 있지만, 대부분 공개되지 않는다. 얼핏 한가로워 보이는 미술관도 실은 많은 사람들이 근무하는 중일 때가 많다. 전시실은 관람객 한 명 없이 조용할지라도, 벽 너머의 학예실이나 보존처리실에서는 오늘의 전쟁을 활발히 치르는 중일지 모른다. 건물 지하에선 다음 전시의 준비를 위해 작품을 운송하는 기사들이 트럭에서 포장된 미술품을 꺼내고 있을지 모른다. 아무도 없는 전시실이라고 생각해도, 뒤를 보면 늘 전시장 지킴이와 보안요원이 서 있을 것이다. 모두 미술관이 보여주지 않는 수면 아래의 이야기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미술관의 전부인 전시실의 모습은 미술관이 꺼내놓은, 아름다움의 정수를 보여주는 극히 일부분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도 전시 기간만 볼 수 있는 한정판으로.
새하얀 전시 공간이 캔버스, 조각, 도예, 태피스트리, 설치미술, 영상 작품들로 채워진다. 가로로, 세로로 놓이고, 천장이나 벽에 매달아지고, 한쪽에 쌓거나, 균일하게 놓거나, 여백을 두고 놓인다. 네모난 전시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을 상상하기 좋아한다. 나는 리움 미술관 전시실의 원래 모습은 모른다. 어떤 가벽도 설치되지 않은, 건물 본연의 벽과 공간의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전시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 결과물을 여러 가지 알고 있을 뿐이다. 전시를 볼 때마다 달라지는 전시실의 모습을 보며, 때로는 전시의 처음을 상상해 본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전시의 컨셉에 따라 디자인되어 가는 과정들을 상상할 때면, 소름 돋는 짜릿함이 느껴진다.
강서경이라는 작가는 이 전시를 통해 알게 된 작가다. 전시명은 <버들, 북, 꾀꼬리>. 무슨 소리일까? 연관성 없어 보이는 단어들의 나열이 어떤 의미를 띄고 전시를 이루게 될까. 전시장의 입구에서 이어진 창가에는 단정한 우드 프레임이 연이어 놓여 있었고, 그곳엔 문장이 있었다.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구십삼춘 짜내느니 나의 시름
누구서
녹음방초를 승화시라 하든고
분명 전시 제목의 단서일 거라 생각되지만, 여전히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잘 알지 못한 채로 전시를 보는 걸 좋아하는 나는 그냥 계속 보기로 한다. 그리고 중앙으로 들어선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벌어진 입은 다시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두 눈이 위아래로, 양옆으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전시는 설치작품과 캔버스 작품이 섞여 있었다. 리움의 높은 층고와 넓은 공간을 활용하여,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굉장했다. 규모도 컸고, 종류와 소재가 다양해서 한 사람의 결과물로 생각하기 어려웠다. 벽에 걸어놓은 태피스트리 작품은 너무 커서, 거대한 리움의 벽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어떤 작품은 태피스트리인가 하면, 어떤 작품은 철제 프레임이었다. 하나의 작품에 쓰인 재료만 철제, 털실, 비즈, 플라스틱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조화로웠다. 한 공간에 많은 작품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작품 간에, 그리고 작품과 공간 사이에 조화로움이 있었다.
창가에 놓인, 전통문을 표현한 철제 프레임이 햇살에 반짝였다. 작품은 자체로 프레임이 되어 창밖의 풍경을 그림처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 캔버스 작품이 앞에 놓인 작품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귀 모양의 작품은 아래의 수많은 작품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다는 듯, 품어주는 모양새였다. 작품들은 벽은 물론, 바닥과 창가, 천장까지 공간을 모두 활용하여 전시되고 있었지만,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만을 내세우지 않았다. 마치 저희끼리 대화하듯 전시실은 복닥복닥 포근포근했다.
조화로움.
전시를 보며 조화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아름다운 자연에 갔을 때 마주하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조화로움에 대해서. 가령,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문득 주변을 바라봤을 때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멀리 진초록의 숲이 펼쳐져 있고, 산책로엔 작은 아교목의 꽃사과나무와 홍단풍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서로의 다채로운 색을 뽐낼 때, 우리는 소담스러운 하얀 꽃잎과 초록 나뭇잎, 빨간 단풍잎을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 하늘엔 조각구름이 천천히 헤엄치고, 시선 끝에 걸린 나뭇가지엔 작은 새들이 지저귈 것이다. 보통의 공원 풍경이다. 특별한 곳을 가야만 볼 수 있는 장관은 아니다. 다만 오랫동안 바라봐야 보인다. 주의를 기울여 바라볼 때, 공원에서, 동네 뒷산에서, 산책로에서 봤던 자연 고유의 색들과 모양, 구성, 촉감, 소리가 함께 자아내는 아름다움에서 우리는 조화를 느낄 수 있다.
강 서경의 전시에는 자연에서 느끼는 조화로움이 있었다. 전시는 철제 프레임으로 자연을 담아놓았다. 풍경 속에 있는 우리가 풍경을 바라보다 아름다움이 지나칠 땐, 손가락으로 프레임을 만들기도 한다. 그때 손가락 프레임 속의 풍경은 그림이 되기도, 사진이 되기도, 글이 되기도 한다. 강 서경이 작품을 통해, 전시 구성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은 자연의 조화로움이었다. 캔버스와 오브제, 음악으로 구성된, 찰나의 자연을 전시장 안에서 살게 했다.
나는 공원 산책로를 거닐 듯이 전시장의 작품들 사이를 산책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롭게 보이는 작품들의 면면들이 흥미로웠다. 오브제들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새롭게 보였다. 지루할 틈이 없었다.
전시실의 중앙에 선 나는 이 공간에 아직 작품들이 오지 않은 태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필요에 따라 가벽을 설치하고, 벽에 색을 입히고, 설치품을 여러 높낮이로 배치한다. 캔버스는 일정 간격을 두고 벽에 걸고, 중간에 앉아 쉴 수 있는 벤치를 놓는다. 구석에는 영상 작품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입구에 암막 커튼을 달아놓는다. 상상하는 동안, 마치 추리 소설을 읽는 것처럼 긴박감이 넘치고 흥미진진해진다. 그런데 이런 상상 과정의 최종, 아니 상상이 아닌 실제의 아름다운 최종 결과물 안에 지금 내가 서 있다. 이건 마치 휼륭한 농담 같다. 잠시 허공에 떠 있는 듯하다. 말도 안 되는 농담 같은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