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pr의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
사기꾼의 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을 쓰겠다. 공감을 해줄 사람이 있으려나 궁금하면서도 어설픈 글재주로 인해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할까봐 약간 두렵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나는 내 정신에 대해 자랑할거리가 전혀 없다. 생각을 하는 뇌를 물레방아에 비유하자면 내가 붓는 곡식은 탐스럽게 익은 벼가 아닌 쭉정이 같이 영양가 없는 건조한 지푸라기에 불과하다. 나의 사고는 지나치게 비약적이고 내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는 지나치게 빈약하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에 든 것이 없으니까 그럴 수 밖에.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책을 좀 더 읽어서 희끄무레한 직관으로 내리는 생각들을 단단하게 동여맬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정말인지 게으르고 귀찮을 뿐이어서 쭉정이를 들이 부으며 물레방아를 돌릴 뿐이다.
민망한 현실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온갖 추상적인 말로 서론을 장황하게 치장하는 버릇은 여전한데 결국 이 모든 일은 지난 일요일에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다.
한명의 강연자와 열명의 청자들로 구성된 소모임에 가입했다. 어떠한 모임이든 통과의례처럼 하는 자기소개시간이 왔고 나는 세마디로 별 특별한 인상없이 끝낼 수 있는 간단한 자기소개를 할 것인지와 조금은 사적이지만 흥미로운 자기소개를 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했다. 그도 그럴것이 나에게는 내향적 관종이라는 모순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회색 분자처럼 무난하게 섞이고 싶어하면서도 남들과는 다르고 싶어하고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관종끼(?)가 공존한다. 내 차례가 왔고 나는 정말인지 멋들어지게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정연한 말투로 때로는 호소하듯이 말을 하는데 정말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다.
놀라운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에는 약간 지루한 표정으로 책상만 바라보던 사람들이 내가 말할 때는 고개를 들어 경청했고 심지어 나의 말이 끝나자 박수까지 쳐주었다는 것이다.
태생이 사랑스러운 나의 남편이라면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한껏 즐거워하며 집에와서 자랑했겠지만 나는 식은땀을 쭉 내며 사기꾼의 변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 동안 황송한 평가들을 들으며 지내왔는데 그 중에 정말 날 불편하게 하는 칭찬들은 다음과 같다.
“말을 잘한다, 통찰력이 있다, 생각이 깊다, 내면세계가 풍부하다.”
특히 달변에 대한 칭찬은 여러번 들어봤는데 그 달변이라 함은 어디 나가서 웅변을 멋지게 하는 것도 아니며 토론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것도 아닌 일대일의 만남에서 입을 잘 턴 후에 듣는 말이었다. 사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멍청한 소리라도 그럴싸하게 들리는 방법을 터득한것 같다. 그 방법이라함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가 말을 하는 내용보다는 확신에 찬 표정, 매끄러운 문장처리, 안정감있는 어투에 더 영향을 받는 것 같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식으로 말을 하다보면 상대방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면 신이난 사기꾼은 더욱더 가늘게 뜬 눈에 힘을 주어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이어가게 된다. 한껏 즐거운 대화를 마친 후 상대방이 칭찬을 하기 시작하면 민망함을 견딜 수가 없다.
사기행각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바보소리를 하거나 사실 별 생각 없이 지내는 단순한 사람이라며 너스레를 떨고 말지만 집에 와서는 괴로움에 몸서리친다. 받지 말아야할 칭찬을 받았다는 점도 고통이지만 알맹이가 없는 생각을 뭐라도 되는 양 한껏 부풀린 나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알면서도 그냥 속아주는건지 아니면 정말 내 사기 행각에 속아주는 건지 모를 사람들의 반응이 날 비웃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얼마 남지 않은 밑천이 훤히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자기 pr의 시대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체감한 것은 최근이었다. 지나치게 수줍어하는 나와 달리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잘 포장할 줄 알았고 그걸 부풀리는 것을 능숙하게 해낸다. 달변가 사기꾼답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편인데 알맹이도 논리도 없는 말을 똑똑한 체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저 사람들도 집에 가면 사기꾼의 변명을 늘어놓으며 괴로워할까라는 궁금증도 잠시, 좀 더 이야기하다 보면 그런 사람들은 요즘 시대에 그 정도 포장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게 드러난다.
달변가 사기꾼은 글을 쓸 때만큼은 지나치게 진솔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자소서를 쓸 때면 정말인지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다. 적어도 글에서만큼은 차마 사기를 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부풀린 말은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버리게 되어 남는 것이라곤 그 때 혀에서 부드럽게 넘어가던 발음의 부딪힘이겠지만 부풀린 글은 이후에 마주쳤을 때 메스꺼울정도로 느끼하고 썩은내가 진동하여 양심을 예리하게 찔러댄다.
sns이든 그 어디든 심지어 가장 사소한 일상생활 마저 각을 잡고 자연광 아래 좋은 화질로 찍은 사진을 연출해낸다. 그런 사진을 보면서 요즘 잘 지내나보더라? 라는 말을 들으면 사기꾼은 제법 부끄러워진다. 이런 현상이 그저 트렌드인지 아니면 최초의 인류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인간의 본능인지는 모르겠으나 사기꾼은 이제 그만 가면을 벗고 싶다. 일상은 망막에만 담는 것으로 충분하고 그 어디든 자기소개서에 무용담이 아닌 실패담을 장황히 늘어놓아도 되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나라는 없으니 오늘도 사기꾼은 스스로를 그럴싸하게 포장해가며 간신히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