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남자가 장발로 산다는 것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내게 머리카락은 그냥 내버려두면 자라는 것,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돈을 들여 잘라줘야 하는 귀찮고 쓸모 없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내 머리카락을 요긴하게,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쓸 수 있는 일이 있다. 바로 <사랑의 모발나누기 캠페인>이다.
http://www.himo.co.kr/board.php?bbs_id=donation_history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으며 간단히 요약하자면
1. 염색이나 퍼머를 하지 않은 자연 상태의 모발로
2. 고무줄로 묶었을 때 길이가 25cm 이상
이면 모발 기증을 할 수 있다.
기증된 모발은 백혈병과 소아암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의 가발을 제작하는데 사용된다.
이 캠페인을 알게 된 후 나는 곧바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는 그렇게 오랜 시간과 노력이 걸리고, 게다가 엄청 따가운 시선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결론부터 말해 내가 25cm 이상의 머리를 기르는데는 2년 3개월이 걸렸고, 그 동안 이발비는 절약할 수 있었지만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했다.
우선 제일 큰 것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이렇게 글로 적으면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정말 한국 사회에서 남자가 장발로 다닌다는 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은 스쳐 지나가며(물론 서울, 그 중에서도 홍대 주변에 가면 장발남이 꽤 자주 보이기 때문에 훨씬 덜하다) 간혹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면 깜짝 놀라는 사람도 있다. 부모님과 친척들이 더러워 보인다고 머리 자르라고 성화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만약 애인이 있는 상태에서 확고한 동의 없이 머리를 기르면 심한 경우 헤어지게 될 수도 있다. 왜? 머리 긴 남자와 걷는 일은 부끄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무조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이 사람 뭐지?' 하는 눈빛이다. 심지어 예술 하시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종종 있다. 물론 모발기증을 위해 기르는 중이라고 일일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선의로 하는 일을 미리 제 입으로 말한다는 게 좀 이상하기 때문에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다음은 관리하는 시간의 증가. 보통 남자 머리는 감는데 30초, 말리는데 1분, 왁스 등을 바르고 정리하는데 1분이면 충분하다. 물론 드라이를 하면서 뜨는 옆머리를 눌러 준다거나 조금 머리가 길어서 감는데 시간이 더 걸리거나 할 수는 있겠지만 대체로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깨를 넘는 장발은 정말 손이 많이 간다. 완전히 두피까지 말리려면 드라이기만 10분을 들고 있어야 한다. 샴푸도 많이 들지만 샴푸를 하고 머리카락이 덜 엉키도록 린스를 하고 10분간 말린 다음 빗질까지 해야 한다. 정말 짧은 머리와는 차원이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그 뿐인가? 머리카락만 관리하는 게 아니라 방의 청결도 관리해야 한다. 긴 머리는 잘 빠지는 데다가(엄밀히 말하면 끊어지는 것 같다)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방이 더러워보이기 쉽다. 그래서 수시로 테이프 등으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야 하고 욕실 배수구도 자주 청소해야 막히는 걸 방지할 수 있다.
둘 중에 어느 게 더 심한 대가인가 묻는다면 단연코 전자다. 머리 감기와 방청소는 열심히 하면 되지만, 그리고 귀찮아도 내가 참으면 되지만 남들의 따가운 시선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평소 남의 눈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 편인데도 그랬으니 소심한 사람은 얼마나 괴로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남자가 있다면 그 인내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묶어서 25cm라는 기준을 달성하는데는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한 1년 정도면 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2년 3개월이 걸렸으니 말이다. 사진상의 머리는 그냥 늘어뜨려서 재면 40cm에 가깝지만 뒤로 묶으면 간신히 25cm를 넘을 정도가 된다. 그러니 그냥 25cm가 되면 바로 자를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머리를 자르러 갔을 때 잘라주신 미용실 원장님이 기증하려고 자르는 사람은 내가 세 번째고 남자 중에는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멋지다고 해 주셨는데(이 말은 기증하려고 머리 기르는 중이라고 하면 거의 무조건 듣게 되는 말이다) 사실 나는 내 자신이 멋지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왜냐면 내게 머리는 그냥 내버려두면 자라는 것이지만, 이걸 참고 기르기만 하면 누군가 세척하고 가공해서 가발을 만들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 아닌가. 그러니 오히려 나는 이런 일을 하는 하이모에 감사함을 느낀다.
머리를 자르고 나서 내가 느낀 기분은 '아, 홀가분하다'였다. 나는 항상 남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는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게 모르게 남의 시선에 압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200g을 넘는 머리카락이 갑자기 뒤통수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물리적으로 가볍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내 머리카락은 나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아무쪼록 하이모에서 잘 처리해 필요한 아이에게 예쁜 가발을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아직도 가끔 내가 짧은 머리로 돌아왔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적응할 것이다. 20년 이상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