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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Dec 12. 2018

내 삶은 무엇으로 충전하는가

 오늘 <씀>에서 날아온 문구가 ‘휴대폰 충전은 하루종일 신경쓰면서 정작 내 삶은 무엇으로 충전하고 있는가’다. 아주 좋은 물음 같아, 낮의 열기가 빠져 나가지 않은 내 방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오후 내내 방에 틀어박혀 영화를 보다가 물을 뜨러 나갔는데 정수기에 물이 별로 없었다. 정수기에 채울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몸을 돌린 나는 순간 엇 하고 그 자리에 섰다가 창가로 다가섰다.
 하늘이 너무 예뻤다. 그냥 하늘이 예쁘다, 구름이 예쁘다기보다는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하늘 가장자리에는 약간의 옅은 구름이 떠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새파란 색이 시야의 위쪽 반을 점했고, 그 아래 라파스의 알록달록한 산줄기가 자리했는데 산과 하늘의 경계가 너무나 선명했다. 마치 망원경, 아니 현미경을 들고 공기와 산의 다중적이면서 존재하지 않는 그 경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 선명함은 마치 내가 독수리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고, 나는 독수리가 되는 게 좋았기 때문에 부엌 창가에 한참을 서서 산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 산을 보는 것이 나를 충전해 주는 일일까? 히말라야나 일리마니 등 눈 쌓인 산만 보면 올라가고 싶어 침을 질질 흘리는(그러면서 막상 올라가면 죽어버릴 것 같다고 징징대는) 나이지만 그게 나를 충전해 주는 전부는 아니다. 좀 더 넓은 범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이 나를 충전해 주는 것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동시에 떠오른 것은 글쓰기와 영화보기, 고양이였다. 영화보기는 가장 먼저 제외됐다. 심심할 때 영감을 얻기 위해, 또 재미를 얻기 위해 보기는 하지만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내 삶이 무기력해지진 않는다. 글쓰기와 고양이 중에서는 또 쉽게 승부가 갈렸다. 글쓰기를 할 때는 창작의 고통을 느끼지만 고양이는 내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았다. 고양이 보기가 아니라 ‘고양이’인데도 이유가 있다. 고양이는 보기만 하는 사물이 아니라 한 공간 안에 공존하는 또다른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사실 글쓰기는 하루종일 할 수 없지만 고양이랑 있는 건 하루종일 할 수 있다. 때때로 내버려두어도 되고, 가끔 찾아오는 고양이에게서 그 희귀한 교감의 찬스에 희열을 느낄 수도 있다. 고양이가 있는 집에 살아보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이정도로 요즘 내가 고양이에 대해 느끼는 애정은 깊다.
하지만 한국에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가 깊다. 유튜브에서 고양이 키우기를 검색해보니 고양이는 키우는데 전문가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최소 7평에서 15평 정도의 집이 있어야 하고, 수직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하며, 매일 1시간 이상 사냥놀이를 해줘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버려지고 길 잃은 불쌍한 유기묘들이 많기에 그들을 데려와 키운다면 그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해도 고양이에게는 더 나은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고양이의 심정을 내가 어찌 알랴. 심지어 수명이 10년 가량 되는 고양이인데 내가 섣불리 입양해 좁은 방에서 외로이 키운다면 그것도 역시 가혹한 일이 될 것 같아 큰 집에 살기 전까지는 보류하기로 했다.
 쓰다보니 또 삼천포도 아니고 고양이 사랑으로 빠졌다. 중요한 건 나를 충전하는 게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것이고, 내게 그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여유롭게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다지 실천하기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심지어 서울에 취직한다면) 여건이 좋지 않다면 방에 히말라야 사진이라도 커다랗게 인화해 걸어두어야겠다. 휴대폰보다 중요한 내 자신의 충전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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