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송 May 12. 2019

저출산 문제는 갈 길 잃은 우리 사회의 표상

 저출산이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많은 사람들이 등장해 갑론을박하며 그래도 문제를 잘 분석해 나가고 있다. 여태까지 발견된 사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1. 혼인을 한 사람의 출산율은 떨어지지 않았다. 2. 혼인율이 떨어지는 것이 저출산의 문제이다의 두 가지일 것이다. 통계적으로 사실임이 확인된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저출산 해결을 위해서는 혼인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해야 혼인을 하게 만들 수 있을까?

 혼인이라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사회적으로 정착시킨 하나의 제도로,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가 결합해 한 쌍의 부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부다처제 혹은 일처다부제 혹은 다처다부제의 혼란을 벗어나 일부일처제로 자리 잡은 것은 그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가장 안정될 수 있는 방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개인의 권리에 대한 현대철학이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왜 결혼을 해야 하는가?

 왜 자식을 낳아야 하는가?

 이 두 가지가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질문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결혼도 출산도 개인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심각한 억압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사람들은 일정 수입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의견에 많이 동의하고 있다. 월 200만 원을 버는 사람이 혼자서 산다면 월세 40, 통신비 10, 관리비 10, 식비 40 등으로 100만 원을 쓰고도 100만 원의 기타 지출을 행할 수 있는 반면 만약 둘이서 살게 되면 200만 원으로는 먹고살기도 빠듯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 아이까지 생긴다면 맞벌이 부부의 경우 베이비시터를 두는데 한 달에 200만 원 가까운 비용이 들게 되므로 설령 200+200으로 400의 수입이 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수입으로 두 사람이 먹고살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러한 부분을 국가에서 보조한다고 하긴 하지만 전적으로 아이의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돌봄 서비스를 무상 지원하지 않는 이상 낮은 소득으로는 부모의 희생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대인들, 구체적으로는 앞으로 아이를 낳을 20, 30대 청년들이 그러한 희생을 감내할 생각이 있는가? 답은 전혀 아니올시다 다. 이것은 '그르다' 혹은 '잘못됐다'라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50, 60대 어른들에게 당시에 아이를 낳을 합리적 이유가 있었다면 우리들에게는 지금 아이를 낳으면 안 될 합리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30대 초반의 청년이지만 출산과 양육을 위해 내 삶을 희생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나의 사유가 모두의 사유가 될 순 없지만 그런 희생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들어본다.

 첫째, 한국 경제가 불안하다.

 지금 내 수입은 혼자서 먹고 살기엔 넘치는 수준이고 둘이서 먹고살아도 남는 수준이며 아이도 한 명은 낳아 기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게 걸림돌이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으로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직격타를 얻어맞는 일이 이미 일어났고, 정부에서는 시급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삼성과 하이닉스도 세계 반도체 산업의 경쟁 속에서 힘든 시간을 맞고 있으며, 조선은 중국에 작년과 재작년에 쓴맛을 보았고, 자동차는 중국산 전기차와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대장 산업들이 쇠락한다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한데, 자원은 없고 기술만 있는 나라로서 어떻게 싸워나갈지 국가적 비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만약 덜컥 결혼하고 애를 낳았는데 경제가 쇠락해 수입이 줄어든다면, 어떻게 아이를 유복하게 키울 수 있겠는가. 만약 그리 되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바에는 처음부터 낳지 않아 고생시키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둘째, 아이를 갖는 게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홀로 살 때는 누구나 자기가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잘 알고 있다. 퇴근 후 마시는 맥주 한 잔, 친구들과 먹는 곱창전골, 홀로 훌쩍 떠나는 드라이브, 며칠씩 방에서 게임만 하기...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함께 하는 삶'이란 목적하에 배제된다.

 원래 갖고 있던 즐거움이 사라졌다면 다른 즐거움이 그것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 배우자와 함께 지내서 오는 기쁨이 있고, 아이가 주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보장된 것은 아니다. 연애할 때는 너무나 좋았는데 결혼하고서 돌변했다는 사람의 사례가 널려 있고, 남자의 경우에는 술꾼이나 도박꾼임이 드러나기도 하고, 여자의 경우에는 괜찮다가도 출산 후 우울증으로 갑자기 피폐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결혼 전 인성을 보라고들 하지만 '적정 연령'과 '집안의 시선'이라는 타자의 시선에 쫓겨 결혼을 하다 보면 기나긴 연애를 하고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데다가, 사실 인성이란 것도 속이려고 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것이라 완벽한 보증은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비교해 보라. 나 혼자서는 내가 행복한 방법을 알며, 그것은 모두 홀로 행하는 것이기에 저해될 염려가 없는 100% 보장된 행복이다. 물론 부부가 함께 하며 생기는 행복은 혼자선 절대 느낄 수 없겠지만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재테크할 때도 '100% 원금 보장' 하는 상품과 '원금 보장은 하지 않지만 10% 수익 보장'하는 상품이 있다면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울까?

 셋째, 이미 사람이 넘쳐나는 사회다.

 옛날 농경사회에선 사람은 곧 노동력이고 그래서 아이가 재산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우리 집에 일할 사람이 없으면 남의 집에 돈 줘가며 일 시켜야 하니 정말 그랬을 법하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되고 많은 부분에서 자동화가 이루어지며 대가족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농촌에서 잉여인력이 된 아이들은 도시로 떠났고, 세계는 공업화 시대를 맞이했다.

 지금 우리는 공업화 시대를 넘어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인구는 어느 때보다 늘어났지만 무인으로 운영되는 편의점이 생겼고, 식당에서 주문은 자판기가 받고 있다. 중국에는 200억이 넘는 돈을 들여 오직 로봇으로만 조리를 하는 훠궈 식당도 생겨났다. 무인 주행으로 수많은 택시, 버스, 화물차 기사가 사라지고 무인 조리로 수많은 조리원들이 사라지고 무인 청소로 수많은 미화원들이 사라진다면 그러한 시대에 인간의 가치는 어떻게 매겨질까? 과연 인간이 '필요'하기는 한 것일까?

 오늘도 노동 현장에선 한 명의 김 씨가 추락해 다치고, 내일도 어느 제철소에서 한 명의 박 씨가 손가락이 잘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리는 인력 사무소에 새벽부터 나와 있던 어느 다른 김 씨와 박 씨가 대체하게 될 것이다.

 디스토피아의 문턱에서, 나는 비혼과 비출산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놓인 위기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희망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주장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푼이 불교신자의 이른 석가탄신일 보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