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된 남자아이가 어머니 손을 잡고 한의원 문을 들어섰습니다. 아이의 팔과 다리에는 군데군데 자줏빛 반점이 퍼져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멍과는 조금 다른, 점점이 붉은 기운이 번진 모양이었습니다. 아이는 며칠 전 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고 난 뒤부터 갑자기 이런 증상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아이는 평소 건강했고, 특별히 잦은 병치레를 하는 편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더 당황스러우셨지요. 운동회 후 즐겁게 웃던 아이의 다리에, 이유 모를 붉은 반점이 생기고 점점 번져 가니 말입니다.
저는 먼저 내과나 소아과를 방문해 혈액검사를 받아보시라고 안내드렸습니다. 자반증은 혈관과 혈액의 문제에서 비롯될 수 있고, 때로는 혈소판 수치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가 잘 멎지 않거나 잦은 멍, 원인 모를 출혈 등이 동반될 때에는 반드시 기본적인 혈액학적 검사가 필요합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제 말을 듣고 곧장 병원을 방문하셨습니다. 검사 결과는 정상 범위였다고 합니다. 아이의 혈액 속에는 특별한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2주 후 다시 찾아왔을 때, 아이의 다리에는 자반이 또다시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몸 안의 불균형을 바로잡아 주는 치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자반증을 단순한 피부의 문제가 아니라, 혈액이 흐르는 길과 열의 상태로 이해합니다. 아이는 운동회라는 큰 활동으로 몸의 열이 치솟았고, 그 열이 혈관을 자극하여 피가 제대로 돌지 못하고 밖으로 스며 나온 것으로 보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피부 아래의 붉은 반점이었지만, 그 뿌리는 몸 안에 숨어 있는 ‘열’과 ‘혈행의 불균형’이었습니다.
저는 청열량혈(淸熱凉血), 즉 몸속의 불필요한 열을 내려주고, 피의 흐름을 맑고 차분하게 해 주는 방법으로 한약을 지어드렸습니다. 아이에게는 조금 쓴맛이 느껴졌을 테지만, 하루하루 빠짐없이 복용할 수 있도록 어머니께서 함께 챙겨주셨습니다.
그렇게 15일이 흘렀습니다. 다시 내원한 아이의 다리에는 더 이상 보랏빛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피부는 깨끗했고, 아이의 걸음걸이는 가볍고 활달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얼굴에 번진 안도와 기쁨이 제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원장님, 약을 먹고 나서는 자반이 싹 없어졌어요. 이번엔 다시 생기지도 않았어요.”
그 말속에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게 된 감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소아 자반증은 흔히 성장기 아이들에게 갑작스럽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격한 운동이나 감염, 혹은 알레르기 반응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다행히 대부분은 특별한 합병증 없이 회복되지만, 드물게 신장이나 장기와 관련된 증상이 동반될 수도 있기에 초기에 정확한 혈액검사와 진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검사에서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도, 증상이 반복되거나 오래 지속된다면 몸 안에서 균형이 무너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는 한의학적 치료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열을 가라앉히고, 피의 흐름을 조화롭게 하여 아이의 몸을 다시 안정된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이지요.
의사로서 제게 가장 큰 보람은, 환자와 그 가족이 안도하는 얼굴로 돌아갈 때입니다. 소아 자반증의 경험은 저에게 오래도록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