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로 May 28. 2020

기록을 해야하는 5가지 이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만나는 시간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 이적 <걱정말아요 그대>


그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의미가 있다. 그 시절은 속절없이 흘러갔으나, 여기 지금 내가 남아있다. 그 시절을 기억하고, 겪어낸 내가. 과거는 때로 우리를 우리로서 살게한다.






어려서부터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다. 오죽하면 남에게 쓴 편지도 일일이 사진으로 찍어서 보관했다. 그때의 내가 편지의 상대에게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쁜 일기장을 사서 날마다 기록하는 걸 좋아했고, 밖에서도 손바닥만한 수첩을 들고 다니며 즉각적으로 드는 생각을 적곤 했다. 일기장은 나만의 방과도 같았다. 일기를 펼치는 순간 보이지 않는 방문을 딸깍 닫고, 눌러두었던 마음을 쏟아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정을 배설하는 행위와도 비슷했다.

한창 일기쓰기에 골몰했을 때는 우울하고 힘들 때였다.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고, 일기장이 유일한 분출구였다. 파도치는 감정을 그저 흘려보내는 건 또 싫었다. 없었던 일인냥 훌훌 털어내는 게. 나쁜 기억이든 좋은 기억이든 현재의 나를 만들어낸 사소한 사건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적기 시작했다. 외로움과 불안, 의심, 운명과 불행에 대하여.

문제는 내가 부정적인 생각들만 기록을 했다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확장시키고, 반복하면서 그 생각을 강화했다. 내 삶에서 부정적인 부분은 일부일 뿐인데, 그게 내 전부와 같이 느껴졌다. 나쁜 고리를 끊기 위해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나, 스스로를 기만하는 기분이라 얼마 못가 때려치웠다. 힘들고 우울한 나에게 이미 적응한 뒤였기 때문에 나쁜 생각을 버리는게 어려웠다. 힘들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 두려웠다.

차라리 사실 그대로를 기록해보자는 생각에 블로그를 시작했다.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하루동안 뭘 먹고, 무엇을 했는지, 어떨 때 좋고 싫었는지를 적었다. 블로그에 적은 일상글을 들여다보았더니, 기록하지 않았다면 기억에서 잊힐 평범한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힘든 일은 딱히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내 상상 속에서 내 삶의 역경이 1~10 중에 '8'이었다면, 실상은 '2'정도였달까.

평범한 일상 속에 좋은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사는 낙이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일상 속에서 작게나마 나를 기쁘게 했던 순간에 집중하니 재밌는 일이 꽤 많았다. 부정적인 생각 속에 갇혀있을 땐 보이지 않았던 객관적인 사실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생각보다 행운아였고, 생각보다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많았고, 생각보다 가진 게 많았다. 생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도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일기장을 사용하는 방법도 조금은 달라졌다. 주관적인 기분 외에도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그대로 적으려 노력했다. 예전에는 주관적인 감정만 서술했기 때문에, 일기장에는 짜증스럽고 화난 감정만 잔재해있었다. 한편,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히고 나니 그 사건을 보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볼 수 있었다. 상대만 잘못한 게 아니라, 나 역시 잘못 행동했을 때가 많았다는 걸 알았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고민해볼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기록이 벌써 5년차에 접어들었다. 요즘은 일기를 쓰는 빈도는 줄어들었고, 기록하더라도 간단하게 하루 중 가장 좋았던 일, 나빴던 일, 다음날 할 일 3가지만 적는다. 힘들어서 소화하지 못하고 뱉어내야만 하는 감정이나 사건은 거의 없다. 부정적인 감정이 밀려올 때 거기에 억지로 머물지도 않는다. 최대한 빠르게 생각을 멈추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일찍 잠든다.

모두 다년간의 기록을 통해 얻은 스킬이다. 객관적인 기록이 쌓이고 나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일기장과 블로그에 쓴 글, 그리고 끄적여둔 메모가 모이니, 나란 사람에 대한 빅데이터가 되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하네.', '난 이걸 할 때 즐거워하네.' 계속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서를 통해 현재의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어떤 지점에서 행복을 느끼는지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봄을 즐기고 싶은 날에는 작년 봄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언제 행복해했는지를 블로그에서 찾아본다. 사진첩을 뒤적이기도 하고, 그맘때 작성한 일상글을 찾아보기도 한다. '행복'이라고 검색했을 때 나오는 게시물을 확인하다보면 내가 언제 행복해지는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사진과 글이 남아있으니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을 보다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기록은 과거로 통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행복했던 기억을 기록을 통해 보고 있으면, 내가 언제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다. 한 번 행복해 봤는데, 두 번이 뭐가 어렵겠어? 행복했던 순간들의 기록은 나의 가장 큰 자산이다. 이제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보다는 그걸 극복했던 경험, 행복했던 순간들에 대해 기록하려 한다.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목적이었다. 내가 경험한 것들을 적고, 거기서 느낀 점들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과거를 통해 배우고 얻은 것들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힘들었지만 이내 괜찮아졌고, 다시 힘들어져도 또 이겨낼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와 공감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 말이다.

글은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잘 대변한다. 정작 중요한 사람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나지만, 적어도 글을 쓸 때만큼은 최대한 진실되려 노력한다. 내 글이 가끔 부끄럽고 찌질할지언정, 솔직함을 잃고 싶지 않다. 내 삶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내 삶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기록을 해야하는 이유>


1. 사고를 긍정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2. 기록이 쌓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ex. 습관, 가치관)
3.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4. 좋았던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훗날 그 순간을 비슷하게 재현해낼 수 있다.
5. 미래의 내가 가야할 방향 지침을 알려준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 읽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