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막내로 입사했다. 나 혼자 까마득하게 어리고, 다른 직원들은 경력이 최소 5년 이상이다. 참고로 나는 이제 2년 차가 된 사회초년생이다. 졸업반 사이에 낀 2학년생의 기분으로, 긴장되고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팀 막내는 엉덩이가 무겁네?"
부장님 목소리다. 여기서 '막내'는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자, 털이 쭈삣 섰다. 뒤를 돌아보니, 팀장님께서 팀원에게 간식을 나눠 주고 있었다. 부장님이 말한 '엉덩이가 무겁네.'는 감히 팀장님의 간식 배부 노동을 대신하지 않은 버르장머리 없는 막내(나)를 질책하는 말이었다.
팀장님이 간식을 배부 중이라는 건 맹세코 알지 못했다.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하고 멋쩍게 웃으며 뒤늦게 나서보았지만, 이미 간식 배부 노동은 끝난 후였다. 달려 나갔다가 민망한 빈손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팀장님께 그런 중노동을 시키다니. 나는 천하의 몹쓸 놈이 분명하다.
민망한 마음을 감추고 자리에 앉았으나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간식 하나를 하사 받았지만, 도저히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팀장님이 간식을 나눠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민하게 눈치채지 못한 거? 아니면, 이 회사에 입사한 게 잘못이었나? 혹은 싹싹하지 못한 내 성격이 문제일까.
아, 신이시여. 면접 때 막내로서 잘해줬으면 좋겠다고 한 게 이런 의미였다니. 막내의 본분을 강조하는 부장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막내임을 강조한 건, 나를 귀여워해 주겠다는 게 아니었나 보다. 좀 늦게 태어난 게 죄인가요... 아직 서른 살이 안 된 게 이토록 원통할 수가 없었다.
이후에는 초인종이 울리면 제일 먼저 문을 열러 달려갔다. 점심을 먹을 땐 수저를 세팅하고, 눈치껏 반찬을 리필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막내가 언제 나서야 하는지, 어떤 일까지 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괜히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다가 '막내가 감히!'라는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걱정이 태산이다.
옆에서 상황 설명을 들은 K(자칭 꼰대들의 아이돌)는 같은 막내로서 팁을 전수해줬다. K는 '막내의 덕목은 항상 주변을 살피는 것'이라고 했다. 주변에 부족한 것은 없는지, 자신이 챙길 것은 없는지를 꼼꼼히 봐야 한다고 한다. 일례로, 그는 부장이 출근하면 가끔 커피를 한 잔씩 타서 가져다준다. 그밖에 상사 말에 폭풍 리액션하기, 폭풍 띄워주기('오오, 역시 대단하십니다.') 등으로 점수를 따두면 좋다고도 했다.
이 녀석... 생각보다 험난한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구나. 사회생활 만렙이라고 생각했으나 저렇게까지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커피 타기는 도저히 따라 하고 싶지 않고, 일단 막내학개론에 한 줄을 추가해본다. '막내는 무릇 미어캣처럼 사방을 경계해야 한다.' 좋은 팁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졸업반과 조별과제를 하는 기분이란 건, 업무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사용하는 업무 용어를 혼자 알아듣지 못할 때가 그렇다. 못 알아듣는 단어를 다이어리에 적어놓고 인터넷에 하나씩 검색해본다. 왜 한국에서 영어 줄임말을 이다지도 많이 사용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건, 맥락상 유추하거나 선임에게 슬쩍 물어본다.
타 회사 사람에게 전화를 걸 땐 긴장이 된다. 하고자 하는 말을 혹시라도 버벅거릴까 봐 걱정돼서 다이어리에 대본을 적어둔다. 심호흡을 한 뒤 전화를 걸고, 다이어리에 있는 메모를 지침 삼아 통화를 한다. 통화를 끊을 땐 '네, 들어가십시오.' 혹은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라고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한다. 보통은 '감사합니다.'하고 끊는 게 대부분이다.
나도 잘하고는 싶다. 인생 2회차처럼 막내 역할도 뚝딱해내면서, 업무도 경력 10년 차처럼 능숙하게 잘하고 싶다. 물론 현실은 다르다. 내 인생은 1회차고, 경력은 이제 2년 차다. 누군가 나를 딱 붙잡고 모르는 건 다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역시나 요원한 일이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선임이지 내 선생님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막내 역할에 딱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남들이 내게 거는 기대가 적다는 점이다. 부장님은 나를 까마득하게 어리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업무 처리에 미숙해도 너그럽다. 작은 일 하나를 해도 선임들이 했을 때보다 더 칭찬받기도 한다. 스스로를 독립적인 이십 대 중반의 어른이라고 생각해왔으나, 몇 번 꼬맹이 취급을 당하다 보니 스스로가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덕분에, '아직 2년 차밖에 안 됐는데 이 정도면 잘하는 거지.' 하며 뻔뻔해지고 있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때, 일을 잘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는 게 싫어서 같은 프랜차이즈의 일만 몇 년씩 이어서 했던 적이 있다. 몇 년 간 손에 익은 일이고,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보니 같이 일하는 사람 중 내가 제일 일을 잘했다. 사장님들은 숙련된 아르바이트생이 있다는데 만족했고, 그들의 인정에 나도 만족했다.
아르바이트뿐이랴. 어림짐작 하기에 잘 못할 것 같은 일은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다. 마음은 편했다지만 할 수 있는 일의 스펙트럼은 좀체 늘어나지 않았다. 새로운 일에 도전했으면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할 줄 아는 일이 한 가지는 더 늘어났을 거고, 적어도 그 일이 내게 잘 맞는지 고민해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이제는 익숙지 않던 일이 점점 숙련되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넓어지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안다. '흑역사도 역사'라고들 한다. 잘못해도 뭐든 시작을 해야 잘하게 된다. 처음 해보는 일은 미숙하고, 모르는 게 많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능숙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르면 배우면 되는 거고, 잘 못하면 연습하면 된다. 상상은 잘 안 가지만, 상사에게도 언젠가는 막내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부족하고 미숙한 시절을 지나왔듯이.
매일 어제보다 한 가지씩 더 배우다 보면, 어느샌가 나의 막내시절도 지나가 있을 테다. 천천히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리란 다짐을 해본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내가 상사가 되면 막내에게 간식 배부 노동을 시키진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