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로 Feb 12. 2023

전원일기

장래희망이 청년 농부는 아니지만.



(이 글은 글쓰기 모임에서 랜덤한 주제로 작성한 글입니다.)




내가 받은 글감. 전원일기. 드라마 제목이지만 본 적도 없고, 이 글 하나 완성시키겠다고 ‘저의 장래희망은 청년 농부입니다.’하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냅다 어학사전부터 켜보았다. ‘전원’의 사전적 의미. ‘논과 밭. 도시에서 떨어진 시골.’ 큰일 났다. 최근의 관심사와 너무 동떨어져있다. 이 글감을 준 사람이 급격하게 원망스러워지지만 내가 적어 낸 글감을 뽑은 사람도 그만큼 나를 원망하고 있을 테니 군말 없이 어떻게든 뭐라도 더 써보기로 한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소위 말하는 촌동네였다. 행정 구역 ‘읍’에 속하고, 산책하다 보면 소도 있고 논도 있고 밭도 있는 그런 곳. 버스 노선도 오직 하나뿐이었는데, 그 버스를 타고 나와야 제대로 된 상가가 있는 ‘시내’에 나갈 수 있었다. 어린 내가 경험해 본 지역이란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사는 동네에서 시내로 나갈 때면 굉장한 여행이나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설레던 기억이 있다.

버스 여행에서 내가 가장 설레는 구간은 바로 팽성 미곡 처리장에서 통복 시장으로 넘어가는 구간이었다. 그 구간에는 마치 읍과 시내를 가르기라도 하듯 커다란 언덕이 하나 있었는데, 버스를 타고 그 언덕을 넘을 때면 롤러코스터 못지않은 스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우리 집이 잘 사는 집인지, 못 사는 집인지, 어느 동네가 땅값이 높은지 낮은지 천지분간이 안되었던 터라 씁쓸한 마음은 없고 그저 언덕배기를 버스로 오르고 내리는 일이 재밌기만 했다.

덩치가 커다란 버스가 오르막을 슬렁슬렁 오르다가, 가장 높은 구간에 오르고, 마침내 내리막으로 향할 때면 몸이 앞쪽으로 쏠리고 단전이 아래로 훅 잡아당겨지는 짜릿함을 느꼈다. 지금은 동네 전체가 개발이 되어 언덕도 평지로 개간되고 아파트가 들어서서 천지개벽, 상전벽해 뭐 그런 말들이랑 잘 어울리는 동네가 되어버렸다. 가끔 예전 동네에 가서 버스를 탈 때면 더 이상은 롤러코스터, 아니 버스의 스릴을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쉬워지곤 한다.

대학에 가고, 자취를 시작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고, 직무를 변경하여 이직을 하고. 내 삶도 읍과 시내를 나누던 언덕배기처럼 어떤 가파른 변곡점을 지나 지금에 와있다. 지금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나가는 풍경처럼 내 삶도 예전과는 많이 변한 것 같다. 천지개벽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개벽 정도는 되지 않을까.

삶은 항상성이 없어서, 개간된 언덕배기처럼 또 언제 내 삶의 장면이 휙 바뀔지 모르겠다. 그러니 예전이 좋았지, 지금이 최고지 따지고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버스를 타고 여행하듯이, 지나온 정거장들을 추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거겠지.

쓰다 보니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너무 멀리 온 것 같으니, '전원' 두 글자는 슥 지워내고 그냥 '일기'라고 봐주시길. 언젠가 드라마 전원일기를 보게 된다거나, 청년 농부의 꿈을 꾸게 된다면 이 글을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작가의 이전글 쿨한 사람 대신, 쓰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