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로 Mar 05. 2023

쉬운 미움과 어려운 사랑

쉬운 미움 대신 어려운 사랑을 배우고 싶다.
- 김신지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일상에서 미운 구석을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다. 나를 평가하는 시선에 노출될 때,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웃어야 할 때. 바쁜 일 때문에 김밥 한 줄을 먹으면서 노트북을 들여다볼 때, 체면보다 잠이 더 중요해서 머리를 못 감고 온 날 두피가 간지러울 때.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건데 나 왜 이러고 사냐?" 하는 물음은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쳐드니까.

그러니까 내가 내 삶을 미워하고, 나 자신까지 미워하게 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반대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고.

내 삶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던 순간이 있다. 고시원에서 원룸 반지하, 반지하에서 구옥 투룸, 구옥 투룸에서 신축 투룸 빌라에 입주하면서 야금야금 거주지를 레벨업 시키는 스스로가 대견했고, 이직을 통해 오른 연봉도 마음에 들었다. 이제 나를 기다리는 건 행복과 아파트 입주뿐이라고 믿었다.

삶의 질이 높아질수록, 다시 나빠져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굳세어졌다. 글을 쓸 때는 "인생은 위로 레벨업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옆으로 넓어지는 것이지요 ^^"하면서 통달한 현자인 척해놓고, 정작 내 마음은 "내 인생에 절대 퇴보란 없다."라고 선을 그어놓고 있었나 보다. 이미 힘든 순간을 건너왔고, 우울함의 늪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같은 수순을 밟을 일은 없다는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회사를 다니며 자꾸만 피곤하고 무력해지고, 맥주를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고, 그렇게 좋아하던 소설과 에세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2년간 브런치에 글을 하나도 올리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에 청심환을 찾게 되었을 때도 내가 우울하다는 걸 몰랐다. 스트레스가 많아 심리상담을 받다가 심리검사결과지에 '우울감 높음'이라는 글자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아, 이게 우울함이었구나!

비상이었다. '어라, 난 우울해서는 안되는데?'라는 비합리적인 생각이 든 순간, 내가 우울포비아라도 되는 냥 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걷다가 넘어져서 무릎 좀 까질 수도 있고, 아프면 좀 울 수도 있는 건데. '많이 아파봤으니까 굳은살 생겼잖아? 이젠 이런 걸로 아파하면 안 되지.' 하는 격이랄까.

자고로, 인생 만렙(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나는 이런 우울감 따위, 끙차 하고 한방에 떨쳐낼 줄 알아야 하는 건데. 예전엔 손쉽게 했던 일들이 더 이상 손쉽지 않고, 예전에 나를 즐겁게 해 주었던 일들이 더 이상 즐겁지 않으니 손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걸 리셋하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RPG 게임으로 치자면, 플레이하던 게임 캐릭터(본캐) 대신 새로운 캐릭터(부캐)를 생성하는 것처럼. 플레이 경험은 있지만 육신만은 새로운, 고인물 뉴비가 되는 것이다. 자고로 뉴비는 좀 헤매도 괜찮고, 연약해도 괜찮다.

우울을 '퇴보'라고 부르지 말고, 처음 겪어보는 퀘스트를 깨는 냥 차근차근 다시 시작해 보기로 한다.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걸 찾고, 내 삶에서 괜찮은 구석을 샅샅이 골라내는 거다. 휴, 역시 미움은 쉽고 사랑은 어렵다. 그래도 모름지기 퀘스트는 어려워야 제 맛인 거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