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에피소드에서 '동거'의 흔적을 지우느라 분주했다
'퇴근 후 한 캔'이 누군가에게는 맥주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막걸리일 수도 있다. 내 '퇴근 후 한 캔'은 바로 데자와다. 호불호가 갈리는 음료다 보니 지금 이 글을 읽는 이들 중 3분의 2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겠지만, 데자와를 향한 내 사랑은 십 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편의점에 들러 데자와를 사고 '퇴근 후 한 캔'을 만끽한다. 1+1 이벤트를 하면 두 캔을, 2+1 이벤트를 하면 세 캔을 산다. 밀크티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K군은 이걸 왜 돈 주고 마시냐며 고개를 저었지만,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빈 냉장고를 보고 째깍 데자와를 채워 넣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하루는 데자와가 500ml 페트병으로 출시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환호성을 지르려던 걸 겨우 참았다. 알루미늄이 입술에 닿을 때 감촉이 싫어서 데자와를 제외하곤 캔 음료를 거의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들어왔을까.' 편의점에 들를 때마다 페트병 음료 코너를 기웃거리길 보름.
행사 매대에 500ml 페트병 데자와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출시 기념 2+1 이벤트라니, 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매대는 텅 비어 있었다. '샤이 데자와'의 존재를 실감하며 캔 데자와만 사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K군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K군은 씩 웃기만 하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캔 데자와를 넣기 위해 별 생각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 그곳에는 데자와 여섯 병이 마치 성벽처럼 주르륵 늘어 서 있었다.
"여섯 개 남아 있길래 다 집어 왔지."
나는 그런 K군을 꽉 끌어안지 않을 수 없었다.
K군은 룸 웨어로 흰색 민소매 티셔츠를 입는다. (겨울에는 흰색 반팔 티셔츠로 진화한다) 덕분에 옷장 한 구석에는 똑같은 실루엣의 티셔츠가 층층이 쌓여 있다. 색이 변하거나 해지면 버리고 같은 걸 사서 채워 넣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저녁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K군을 슬쩍 쳐다봤는데, 민소매 티셔츠의 목 뒷부분에 구멍이 작게 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손가락 끝으로 그 구멍을 만지작거렸다.
"새로 사야겠다."
"안 그래도 몇 개 사려고."
K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며 뒤돌아 봤다. 그 바람에 티셔츠는 지지직 소리를 내며 길게 찢어졌다. 나는 헙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어차피 새로 살 거니까 상관없지 않아?"
"……."
점심 식사 후, 디자인팀 실장님과 커피를 마시다 혼자 픽 하고 웃었다. K군과의 에피소드가 떠올라서였다. "무슨 일 있어?" 실장님이 물었지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떤 이야기든 'K군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집 안에서만 생기는 건지. 회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는 우리 둘 사이 있었던 일에서 '동거'의 흔적을 지우느라 분주했다. 함께 만들어 먹은 맹탕 김치찌개는 지난 주말 놀러간 쇼핑몰 내 푸드코트 음식으로 둔갑하고, 일주일에 몇 번이나 데이트 하냐는 질문에는 '세네 번'이라고 얼버무린다.
나는 K와의 동거를 숨길 마음이 없다. 최근 5년 내에 날 만난 친구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몇 년 전에는 양가 부모님을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렸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흰 눈으로 날 바라보든, 내 이름 옆에 적어 넣은 점수에서 수십 점을 깎아 내든 그건 그들의 자유다. 난 그저 내가 편해지고 싶은 것뿐이었다. 이기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회사는 다르다. 별 생각 없이 내보인 사생활의 파편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업무 평가에 개입한다. 차라리 회사를 나가면 금방 잊힐, 성실하면서 그럭저럭 한 사람 몫을 해내지만 사생활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사람인 편이 낫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아마다 마사히코는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켜 '바닥에 남은 제 발자취를 빗자루로 주의깊게 지워가며 뒷걸음질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 얼추 비슷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난 천성적으로 거짓말이 서툴다. 대단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아니지만, 내가 한 거짓말은 편도결석처럼 은은하게 나 자신을 괴롭힌다.
실장님과 나는 같은 날 회사를 나갔다. 사직서에 쓰인 퇴사 사유는 달랐지만, 실은 이음동의어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뒤, 먼저 퇴사한 다른 직원과 함께 셋이서 술을 마셨다. 제법 술기운이 오르자 나는 '다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실장님과는 매일 점심을 먹고 30분씩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30분 동안 나는 '동거'의 흔적을 지우느라 혼자 분주했다. 그것이 못내 죄송했다.
다 털어놓고 나니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술만 마시면 괜히 센티멘털해져서 큰일이다.
실장님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그럴 거 같았어."
역시 거짓말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