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군과 나는 독서를 좋아하지만 책 취향은 조금도 겹치지 않는다
기숙사부터 고시원, 하숙집까지 다양한 주거 환경을 거쳐 왔지만 나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이 살기 위한 집을 고르는 건 처음이었다. K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로에 면한 문을 열면 싱크대와 싱글 사이즈 침대가 덩그러니 놓인 조그만 방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공용'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 나만의 부엌과 화장실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이삿날에는 K군의 고시원으로 1톤 트럭을 불러 짐을 실었다. 5분 정도를 달려 내가 살던 하숙집에서 짐을 실은 다음 이사할 집으로 향했다. 서로 얼굴 한번 맞댄 적 없는 옷가지와 책, 식기 따위가 트럭 짐칸 안에서 하나로 뒤섞였다.
트럭이 떠나고 K군과 나는 상자에 든 짐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독한 독서광인 그 부부는 각자의 책을 어떤 식으로 분류할 것인지, 어떤 순서로 꽂을 것인지, 가지고 있는 책이 중복될 때는 누구의 책을 보관할 것인지, 침대 머리맡 책꽂이에는 어떤 책이 꽂힐 자격이 있는지를 꼼꼼하게 의논하고, 끊임없이 부딪히며 서로의 서재를 합치는 그 신성한 의식에 골몰한다. (김민철, <모든 요일의 기록>, 북라이프, 2015)
우리 두 사람에게는 중복되는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점이었다.
K군과 나는 독서를 좋아하지만, 책 취향은 조금도 겹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일본어를 배우고 국문과를 졸업한 나는 일본 근대문학과 한국 현대문학을 주로 읽는다. 만년필을 좋아해 문구 관련 책을 보면 저절로 손이 가고, '○○의 세계사'나 '세상을 바꾼 n가지 ○○'와 같은 사전식 책을 읽으며 활자에 대한 갈증을 해소한다.
반면 컴퓨터프로그래밍학과를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취업한 K군은 두꺼운 프로그래밍 책을 수십 권씩 쌓아두고 있다. 자기계발서와 주식 및 부동산 관련 책을 즐겨 읽지만 실제로 무언가에 투자하는 걸 본 적은 없다.
특히 정말 자주 읽는 건 판타지나 무협소설과 같은 장르문학인데, 종이책으로도 발간되는 추리소설 정도를 제외하면 전부 전자책으로 읽고 있다. K군의 리디북스 아이디에는 n만 권의 장르소설이 들어 있는데(전부 읽었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 장르문학 종수가 그렇게 많은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책이 겹치지 않으니 누군가 한 사람의 책을 버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는 잠깐의 평화에 지나지 않았다. 8평 남짓 자취방에는 책을 위해 할당 가능한 공간이 많지 않았고, 포화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금방 찾아왔다.
각자 책을 사고 사고 또 사다가 얇은 시집 한 권 욱여넣을 수 없는 상태가 닥쳐오면 책꽂이를 샅샅이 뒤져 팔 만한 책을 골라 중고서점으로 가져간다.
이때 겹치는 책이 없다는 사실은 독이 되어 돌아온다. 관심사가 완전히 다른 탓에 서로의 책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시작이다. 내 공격 대상은 두꺼워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프로그래밍 책이다.
"전공책은 이제 필요 없지 않아?"
"일할 때 참고해야 해서."
(반박할 말이 없다. 돈은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편 K군은 '퇴근 후 간단하게 만드는', '교토의', '2천 원으로 만드는'과 같이 수식어만 다른 가정식 요리책의 존재 이유에 의구심을 품는다.
"요리 안 하는데 팔아도 되지 않나?"
"할 거야. 언젠가는."
(하지만 내게 있어 요리책은 사진집이나 그림책과 그 용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유행 지난 자기계발서와 내 가슴에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한 에세이집이 끌려 나와 종이가방에 담긴다. 전혀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권수에 비해 많은 돈을 받아들고 나서는 언제 투닥거렸냐는 듯이 손을 꼭 잡고 서가를 누비며 책을 고른다.
K군과 나는 자신의 취향을 서로에게 '영업'하지 않는다. 읽어도 읽어도 줄지 않는 위시리스트를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보니 상대방의 영업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다.
하지만 서점을 두리번거리다 어떤 책을 보고 '걔가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혹은 '이 책을 읽으면 걔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때 포인트는 '내 취향'이 아니라 상대방의 특성이나 상대방이 지금 떠안고 있는 고민에 있다.
'모태 문과생'인 내가 K군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문과생을 위한 이과 센스>,
그라면 최초의 프로그래머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을까 싶어서 산 <에이다, 당신이군요. 최초의 프로그래머>,
유튜브 영상의 방향성 때문에 끙끙 앓는 내게 K군이 쥐어 준 <나의 첫 유튜브 프로젝트>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책을 나눠 읽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한 편의 동화와 같은 결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독서 취미에 시간과 돈을 들이는 걸 이해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일상은 한결 풍요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