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개인주의자가 8평 원룸에서 지낼 수 있었던 이유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데, 내가 너무 못된 걸까?
수화기 너머 동생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당시 동생은 연인(이자 지금의 남편)과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애니메이터로 일하던 동생은 취미로도 그림을 그렸다. 문제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집중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동생이 '혼자만의 시간'에 집착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동생과 제부는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다. 동생은 제부가 회사 워크샵 때문에 하루이틀만 집을 비워도 득달같이 내게 전화해 불만을 토해냈다. 반대로 명절을 쇠기 위해 동생이 일주일 넘게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때도 두 사람은 매일밤 그렇게 전화를 해댔다. (이때만큼은 두 사람이 일본어로 대화해 엄마가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네 앞에서만 그러는 거지 집에서는 엄청 좋아하고 있을걸?' 주변에서 툭툭 던지는 핀잔에 동생은 불같이 화를 냈다.
결국 문제는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라 '나만의 공간'이었다.
"언니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그러고 보니 없네."
이유가 뭘까. 동생이 사는 집은 결코 좁지 않았다. 제부가 안방에 있는 동안에는 동생이 거실에서 그림을 그리면 되고, 반대로 제부가 거실에 있을 때는 동생이 안방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8평 원룸에서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너네 집에 네 책상 없지?"
"책상? 응. 전에 살던 집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남자친구 책상 쓰고 있어."
이거다. 필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간섭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 책상이었다.
사춘기 무렵부터 우리는 '나만의 공간'을 얻기 위해 투쟁한다. 귀가하자마자 방문을 탁 걸어 잠그는 것도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온건한 방식의 투쟁이다. 아니, 어쩌면 나만의 공간을 향한 열망 자체는 훨씬 더 어릴 적부터 갖고 있을 지도 모른다.
초등학생 시절 내 방에는 청소년을 위한 세계문학 전집과 위인전 세트가 가득 꽂힌 책상이 있었다. 나는 <검은 고양이>, <로빈슨 크루소>, <세종대왕> 등의 책을 챙겨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연분홍색 공단 보자기로 입구를 막으면 그곳이 곧 아지트였다. 당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은 딱 그 정도 크기였다.
머리가 굵어지고 방 귀퉁이에서 느끼는 공포심이 엷어지면서 감당 가능한 공간의 크기가 커진 다음에야 방 문을 걸어 잠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는 지금까지 '나만의 공간'을 얻기 위해 벌였던 투쟁은 싸그리 잊은 것처럼 안방 하나에 침대 하나를 두고 책상 하나와 화장대 하나, 식탁 하나를 들인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8평 원룸 주제에 책꽂이가 딸린 책상이 두 개나 놓여 있다. 하나는 이사 오기 전부터 옵션으로 들어 있던 것이고, 하나는 내가 쓰기 위해 산 합성목재 상판의 저렴한 조립식 책상이다. 두 개의 책상은 붙박이 옷장을 사이에 두고 벽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내 책상을 두지 않았더라면 더블 사이즈 침대 하나쯤은 둘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책상이 없는 집을 상상할 수 없었다. 발이 책상 아래로 들어가는 고시원에 살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집에서 살든 책상만큼은 꼭 있었다. 결국 우리는 창문 앞에 내 책상을 두고 접이식 매트리스를 들였다.
내 책상은 빈말로도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다. 창틀에는 어울리지 않게 폼롤러가 우뚝 서 있고, 책은 치워도 치워도 일주일이면 층층이 쌓인다. 하지만 이 120cm x 60cm의 공간은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나만의 '성채'다.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가 놓아둔 책을 누군가 슬쩍 다른 곳에 치워 버리고, 들어갈 때마다 보고가 필요한 곳이라면 아무리 넓어도 시설이 잘 되어 있어도 '나만의 공간'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영상을 편집하고, 화장을 하고, 책을 읽고, 유튜브 영상을 보며 밥을 먹는다. 그동안 K군은 등을 맞대고 제 할 일에 몰두한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1m도 채 되지 않는다.
뭘 하는지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긴 해도(대개 내가 K군이 작성하는 코드를 보며 신기해 할 뿐이다) 상대방이 하는 일에 가치 평가를 내리는 일은 없다. 벽으로 나뉘지 않아도,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아도 나는 내 성채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개인주의자 두 사람이 8평 원룸에서 5년 넘게 별 트러블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원동력을 하나만 꼽자면 나는 '책상'을 들고 싶다.
'사랑'일 줄 알았다고? 꼭 섹슈얼한 감정으로 묶여 있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고, 상대방이 내 공간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가족이든 친구든 선후배 관계든 좁은 공간에서 얼마든지 함께 지낼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이 뭐 대단하고 연인이 뭐 대단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