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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Apr 28. 2020

아름다움이 곧 '힘'

민음사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中 <소년>

자기 검열이 심하고 남 듣기 좋은 말만 궁리하는 성격 탓일까. 세간의 평판이나 미추(美醜)와 관계 없이 자신의 취향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 좋다. 그런 점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국내외 작가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이름이다.


혹자는 그의 문학을 가리켜 '투쟁이 없다'거나 '온실 속 인공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변태적 에로티시즘에의 탐닉'이라고 비평하지만, 동서양의 미를 아우르는 유려한 문장만으로도 그의 작품이 갖는 문학적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미친 사랑>, <세설>, <만(卍)> 등의 작품이 번역 출간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다. (그나마 그 '아는 사람' 모두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민음사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을, 그것도 10권씩이나 출간한다고 했을 때는 반가운 마음이 반 놀라는 마음이 반이었다.


민음사 쏜살문고의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은 총 10권으로 구성된다. 데뷔작인 <문신>부터 ‘나오미즘’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치인의 사랑>, 동양 고전으로 회귀한 말년의 문학관을 드러내는 <미친 노인의 일기>까지 오십여 년에 걸친 세계관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그중에서 <소년>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데뷔작인 <문신>과 이듬해 발표된 <소년>, 중기 작품인 <작은 왕국>을 묶은 중단편집이다. 세 작품 모두 문신사 세이키치를 제외하면 주요 인물들의 나이가 십 대 초중반이다.


<문신>의 심부름꾼 소녀와 <소년>의 미쓰코는 다니자키 작품의 여성 인물들이 으레 그렇듯 아름다움으로 남성을 굴복시킨다. 이질적인 것이 <작은 왕국>의 누마쿠라인데, 그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카리스마로 반 아이들은 물론 교사인 가이지마까지 제 손에 쥐고 휘두른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품의 원형 <문신>


뛰어난 실력을 갖춘 문신사 세이키치는 돈만을 좇아 아무에게나 자신의 문신을 남기지 않는다. 오직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살갗과 골격을 가진 사람만이 그의 문신을 받을 수 있다. 어느 여름날, 그는 가마의 주렴 사이로 드러난 맨발을 보고 그 발의 주인이야말로 ‘사내의 생피로 살을 찌우고, 그 사내의 몸을 짓밟을’, 자신의 역작을 남길 여인이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어느 날 게이샤의 심부름꾼 소녀가 그를 찾아와 겉옷과 편지를 내민다. 세이키치는 소녀가 바로 그 발의 주인임을 알아차린다.


나이는 불과 열예닐곱 남짓 되었을까, 하지만 그 얼굴은 이상하게도 오랜 세월을 홍등가에서 보내며 사내 수십 명의 혼을 사로잡은 농염한 여인처럼 완숙미를 갖추고 있었다. 온 나라의 죄악과 재물이 흘러 들어가는 이 도읍지에서 수십 년간 생을 살다가 사라져 간 외모가 아름다운 남녀의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용모였다.


세이키치를 통해 소녀는 내면에 잠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그에게 문신을 새겨줄 것을 간청한다. 세이키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의 몸에 무당거미를 수놓는다.


<문신(刺青)>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데뷔작인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원형’이다. 탐미주의, 여성숭배, 사도마조히즘, 발 페티시즘 등 ‘서양 문물에 대한 동경’을 제외하면 그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한때 이 작품을 원서로 읽고 문장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필사를 시도한 적이 있다. 몽블랑의 ‘버건디 레드’ 잉크로 쓰니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만(卍)>과 <치인의 사랑>이지만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의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면 주저 않고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당시의 연극이나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는 모두 강자였고 추한 이는 모두 약자였다.


이 작품의, 그리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관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 아닐까. ‘강자는 아름답고, 약자는 추하다’가 아니라 그 반대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권력의 이동 <소년>


열 살 소년인 하기와라는 같은 반 아이인 신이치의 초대를 받아 저택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석한다. 학교에서는 친구 하나 없이 울보에 겁쟁이라 소문난 신이치지만, 저택에서는 마부의 아들인 센키치와 누나인 미쓰코를 괴롭히는 ‘어린 폭군’이다.


아역 배우나 어린 게이샤의 손같이 가냘프고 창백한 신이치의 손끝이 교묘하게 움직이며 거칠고 거무튀튀한 살결에 보기 흉하게 살찐 센키치의 얼굴 근육을 마치 고무처럼 재미나게 늘리거나 오그라뜨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쓰코가 피아노를 배우는 서양관에 발을 들인 것을 계기로 하기와라와 신이치는 기꺼이 미쓰코의 발 아래에 무릎을 꿇는다.


<소년>에서는 힘에서 돈으로, 그리고 매력으로 시대 변화에 따른 권력의 이양을 읽어낼 수 있었다. 힘이 센 골목대장 센키치는 신이치의 저택에서 맥도 못 추린다. 산업화 시대에서 권력은 힘이 아니라 ‘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센키치가 아무리 힘이 세다 한들 (그의 아버지는) 신이치 일가에 돈으로 고용되어 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결국에는 미쓰코의 짓궃은 장난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미쓰코는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의 순진함을 갖추고 있어 거리낌 없이 약자를 짓밟을 수 있고, 피아노로 대표되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다니자키 작품에서 강자로 군림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춘 셈이다.



교차하는 두 개의 세계 <작은 왕국>


소학교 교사인 가이지마는 동료 교사나 학부형 사이에서 ‘정직하고 성실한 교사’로 통해왔다. 어느 신학기, 그가 맡은 반에 누마쿠라 쇼키치라는 학생이 전학을 온다. 부유한 집안의 아이는 아니었지만 누마쿠라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카리스마로 반 아이들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심지어 수업 중 떠들었다는 이유로 가이지마가 누마쿠라를 혼내자, 다른 아이들이 제 잘못이라며 그를 두둔하고 나설 정도다.


누마쿠라에게 일부러 다른 아이를 모함하려는 엉큼한 의도가 있던 게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부하들(결국 학급의 모든 아이들)이 본인을 마음속으로 얼마나 따르는지, 얼마나 충실한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가이지마는 오히려 누마쿠라의 권력을 이용해 반 아이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로 한다. 그가 아이들을 하나하나 타이르는 것보다 훨씬 손쉬운 방법이었다. 가이지마의 신임을 등에 업고 누마쿠라는 자신의 ‘작은 왕국’을 세우기 시작한다.


의외로 누마쿠라의 폭정이 아니라 ‘가이지마의 굴종’이 이야기를 절정으로 이끈다.


교사인 그는 누마쿠라가 이끄는 ‘아이들의 세계’와 교실 바깥에 위치한 ‘어른들의 세계’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다. 노모와 아내의 병치레로 곤궁해진 그는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우유 한 통을 외상으로 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대신 ‘아이들의 세계’로 들어가 알량한 권력을 내세우며 가짜 돈을 얻는다. 이후 그는 상점 직원에게 가짜 돈을 내밀며 뜻 모를 말을 주절거린다. 뒤죽박죽으로 섞여 버린 두 개의 세계. ‘전락’의 과정을 진부하지 않게 그려낸 작품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읽는 밤

- 민음사 쏜살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1. 아름다움이 곧 '힘' <소년>

2. <치인의 사랑>

3. <열쇠>

4. <금빛 죽음>

5. <슌킨 이야기>

6. <음예 예찬>

7. <미친 노인의 일기>

8. <여뀌 먹는 벌레>

9. <요시노 구즈>

10. <무주공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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