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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Dec 27. 2019

'나쁜 동물'은 누가 결정하는가

루시 쿡의 <오해의 동물원>(2018)

갑작스럽지만, 연상 게임을 해 보자. 판다,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귀엽다. 나무늘보, 하면? 게으름뱅이. 하이에나, 하면? 비열하다. 우리는 뒤뚱거리는 펭귄을 보며 미소 짓고, 박쥐로부터 '흡혈귀'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무늘보는 그 신체 구조 때문에 시속 1.5킬로미터보다 빨리 움직일 수 없다. 게을러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게 아니다! 축 늘어진 채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도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한 '최적의 자세'다. 진화가 일어나다 만 것 같지만 실은 다른 동물들 못지 않은 환경 적응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연미복을 입은 어린아이처럼 뒤뚱뒤뚱 걷는 펭귄도 물속에서는 시속 50킬로미터의 속도로 회전하고 500미터 깊이까지 잠수한다.


이 바닷새는 인생의 80퍼센트를 어릿광대가 아닌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에 가까운 거침없는 포식자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찰리 채플린처럼 육지에서 뒤뚱거리며 지내는 20퍼센트의 시간만 본다. p.351


이처럼 적지 않은 동물들이 오해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변명을 할 수 없으니 오해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동물학자인 루시 쿡은 저서 <오해의 동물원>을 통해 뱀장어, 나무늘보, 박쥐, 판다, 펭귄 등 다양한 동물을 둘러싼 오해와 그 진실을 이야기한다.


[TED] 루시 쿡 - 나무늘보: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동물의 색다른 삶



인간의 변명


동물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생태 연구를 위한 기술 미비, 두 번째는 교훈 전달을 위한 의도적인 곡해.


책 <일곱 원소 이야기>에는 프로트악티늄, 하프늄, 프랑슘 등 원소 발견을 둘러싼 우선권 분쟁이 그려진다. 주기율표의 빈칸이 적어질수록 새로운 원소의 발견 가능성 또한 줄어든다. 이때 화학자들의 힘이 되어 주는 것이 '기술의 발전'이다. 실제로 인공 원소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면서 1937년 테크네튬(Tc)을 시작으로 이십여 개의 인공 원소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동물학 역시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어떤 동물이든 해부만 하면 탄생부터 성장, 생식, 사망에 이르기까지 전체 생태를 낱낱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특히 뱀장어나 개구리처럼 생식 기관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경우 오해를 사기 쉬웠다.


심지어 그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철새의 이동을 놓고 '변신 이론'을 내놓았다. 계절마다 서로 다른 새가 관측되는 것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새가 완전히 다른 종으로 변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서사시 <동물의 역사>에서 겨울에는 울새였던 것이 여름에는 딱새가 된다고 단언했다. 지금이야 새에 GPS를 달아 철새의 이동 경로를 상세히 그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당시로서는 '변신 이론'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오해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하나씩 논파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딱정벌레가 뱀장어를 낳는다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보고 싶은 대로 보인다


커다란 보름달과 박쥐 떼를 배경으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는 신사. '흡혈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이러한 이미지는 창작물에서 창작물로 전해져 내려오며 어느 문화권에나 통하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1,100여 종에 이르는 박쥐 중 흡혈을 일삼는 건 3종에 불과하다.


나무늘보는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움직임이 느리다는 이유로 '진화의 과정으로부터 버려진 게으른 낙오자'로 굳어졌고, 비버는 '영리한 머리로 경찰이나 법, 정부 시스템이 없이도 인간에 필적하는 교양 있는 사회를 조직하는 동물'이 되었다.


비버의 삶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가르치는 우화가 되기에 그만이었다. 중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성향, 독립적이지만 공공 작업을 위해 기꺼이 협력하는 자세 등은 청교도 윤리에 잘 맞아떨어졌다. p.72


비버가 댐을 건설하는 것도, 칠면조독수리가 '적당히' 부패한 동물 사체를 먹는 것도(썩은 고깃덩어리라고 해서 무조건 '오케이'인 것이 아니다), 일부 식물이 쓴맛을 품고 있는 것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훈을 주기 위해 동식물의 습성에서 인간과 닮은 점을 끌어낸 다음,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선악'을 라벨링한다.


창작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는 시나리오를 쓴다고 가정해 보자. 배경 조사,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저질러 교도소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연히 선택지는 '소설이나 영화 등의 창작물'로 좁혀진다. 비슷비슷한 사건, 비슷비슷한 상징이 넘쳐나는 것도 그때문이다.


만화 '네모바지 스폰지밥'은 바닷속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해면, 불가사리, 오징어, 게 등이 등장한다. 이들은 고증에 맞으면서도 캐릭터성 또한 독특하다. 실제로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원작자 스티븐 힐렌버그는 해양생물학자였다. 기초가 탄탄해야 응용도 가능한 것처럼, 기존의 틀을 깨는 캐릭터 설정은 그가 해양생물에 박식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무언가를 창작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이 역시 '책으로 동물을 배운다'는 사실을 피해 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성실한 비버, 피를 빠는 박쥐, 어리숙한 펭귄이라는 틀에 박힌 상징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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