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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Dec 16. 2019

나는 회복의 가능성을 믿는다

김사과의 <0 영 Zero 零>(2019)

'이 작가는 위험하다.'


고등학생 무렵, 김사과 작가의 <미나>를 읽고 맨 먼저 든 생각이었다. 도발적인 문체나 소재 때문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내던진 자석이 냉장고에 찰싹 달라붙는 것처럼 <미나>라는 작품이 내 '코드'에 꼭 들어맞아서였다. 영향을 받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차기작이 기다려졌지만 읽기는 두려웠다.


그녀의 신작을 망설임 없이 집어 들기까지 십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지금의 나는 어느 한 작품에 '불 같은' 끌림을 느끼지 않지만, 김사과 작가의 소설이 내게 기묘한 형태의 파문을 일으킨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불쾌하지만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기분 나쁜데 그 기분 나쁜 게 좋다.


식인하는 종족


이야기는 '나'가 4년 남짓 만난 연인, 성연우와 헤어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별을 이야기하는 연인. 남자는 여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인간에 대한 엄청난 회의에 빠져들었'고 '경악과 충격, 배신감과 모멸감 등등'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반면 여자는 멀끔한 차림을 한 채 남자의 말을 묵묵히 귀담아듣는다. '관객'이 둘 중 어느 쪽에 연민을 느낄지는 뻔한 일이다.


하지만 롱 코트를 입은 중년 남성이 커피숍에 들어서면서 미묘한 균열이 발생한다. 연인과 이별이라는 중대사를 논하는 동안에도 '나'의 시선은 두 사람을 둘러싼 군중을 향한다. '나'는 중년 남성이 '굳이 아침부터 스타벅스에 와서 생판 모르는 여자와 남자의 찌질한 이별 상황을 훔쳐보'고 있으며, 이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나'는 추레한 몰골로 자신에게 비난을 쏟아 내는 성연우를 속으로 얕잡아 보며 '관객'의 눈에 비친 자신을 상상한다. '연극성 성격장애'라는 병명도 있지만, 연극 배우도 극이 궤도에 오르면 관객을 잊고 온전히 배역에 집중한다.


작가가 속삭인다. '나'가 화자이긴 하나 그녀가 하는 말이 모두 진실인 것은 아니라고.


순간 우리 대화의 관객들 전체가, 꿈에서 깨어나, 저항하지 못하고 이끌리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완벽했다. 완벽하게 적절했다.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나는 완벽하고 적절하며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단정한, 적절하게 관리된 머리카락과 피부, 적절한 자세, 튀지도 또 바래지도 않는 스타일, 무엇보다도 일그러지지도 깨지지도 않는 내 눈빛과 표정, 목소리. 그에 비하면 내 앞에 앉은 성연우의 미묘하게 망가져버린 행색은 누구라도 뒷걸음질치게 만들 법했다.


성연우는 여러 사례 중 하나다. '나'는 끊임없이 사냥감을 물색한다. 이민희는 그런 그녀에게 걸려 삶의 중심을 잃고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졌으며, '나'의 어머니는 살던 집에서 쫓겨나 정신병에 시달리게 된다. '나'는 '가볍고 사디스틱한 영미권의 짧은 산문과 소설을 좋아'하는 박세영에게 독일문학이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소개하고 전염시킴으로써 그녀의 재능을 질식시킨다.


'나'는 먹잇감으로 점찍은 상대에 대해 '어떤 타입인지 꿰뚫고 있다'고 자신하며, 조그만 날짐승을 이리저리 굴리며 갖고 놀다 질릴 때쯤 한입에 집어삼키는 육식동물처럼 주변 사람들을 '잡아 먹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食人)하는 종족이다. 일단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윤리와 감정에 앞서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은 먹고 먹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잡아먹지 않으면, 네가 나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조심하고, 또 경계하라.


뺏고 빼앗기는 아귀다툼, 약육강식의 법칙. '나'의 견해는 일견 틀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는 한정된 재화나 지위를 놓고 벌어지는 경쟁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내가 가진 만 원을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면, 나는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만 원을 빼앗아야 현상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상처입히고, 사람으로부터 상처입는 것은 다른 문제다.


포식에 뒤따르는 '제로'


포식자의 입장에 서 있다고 자신하는 '나'는 타인을 착취하고 상처 입히는 것을 물줄기가 꽉 막힌 연못에서 물을 퍼내는 일 정도로 치부한다. 자신이 '잡아먹'은 이들은 잃어버린 재능으로 인한 상실감과 뼈를 깎는 듯한 배신감으로 인해 천천히 말라비틀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짙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하지만 '나'의 식인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나'가 누군가를 먹어치우고 난 자리에는 살점이 깨끗이 발린 뼈만 남는 게 아니다. 낙담하고 폐인이 될지언정 '나'의 먹잇감은 내일도 숨을 쉬며 생을 이어 나간다. '나'가 깊게 베어 문 자리도 머지 않아 살이 차오를 것이다.


실제로 성연우는 반격을 시도하고, 어머니는 '나'의 거짓말을 까발리며 정신병원에서 나가려고 한다. 박세영은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 이것이 정말 '살기 위한' 식인에 뒤따르는 결과인 걸까.


정작 0, 영, Zero, 零에 사로잡힌 것은 사냥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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