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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May 17. 2020

책장 위 이른 여름

파도 무늬 전자책 단말기 파우치

코바늘을 잡기 시작하면서 꼭 한번 사 보고 싶은 책이 있었다. <원더 크로셰>나 <かぎ針あみの模様(코바늘 패턴)> 시리즈처럼 화려한 패턴이 수십 개씩 실린 사전 형식의 책이다. 사슬뜨기를 비롯한 뜨개 기초는 없어도 된다. 아니, 없는 게 낫다.


무뚝뚝하지만 맡은 일은 척척 해내는 장인처럼 군더더기 없이 편물 사진과 도안만 실려 있어, 만들고 싶은 건 있는데 어떤 무늬로 뜨면 좋을지 모를 때 곁에 두고 참고할 만한 책이 갖고 싶었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한 실력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는 사슬뜨기, 짧은뜨기, 한길긴뜨기나 겨우 뜨는 초보 크로셰터다. 원형 뜨기는 제법 자신감이 붙었지만 타원형 뜨기만 나오면 절절매고, 원통 뜨기를 할 때는 매 시작코마다 단수표시링을 걸어야 마음이 놓이는?


그치만 목표는 크면 클수록 좋으니까. 다소 욕심을 내서 <かぎ針あみの模様(코바늘 패턴) Ⅲ> '화려한 패턴' 편을 장만했다. 손바닥 두 개 크기의 작은 책인데, 100가지 코바늘 패턴이 편물 사진-도안 순으로 실려 있다. 그야말로 내 이상 속의 책이었다.



어떤 무늬를 떠 볼까, 책장을 훌훌 넘기던 중 파도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다가오는 여름을 미리 준비하기에 제격이다. 이랑뜨기가 낯설었지만 이외에는 사슬뜨기와 한길긴뜨기로 이뤄진 간단한 패턴이었다.


무늬는 정했고, 다음은 용도다. 숄이나 티코스터처럼 패턴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작품도 좋지만, 내게는 당장 필요한 게 있었다. 전자책 단말기(리디북스 페이퍼 라이트) 파우치였다. 원래 쓰던 가죽 케이스는 군데군데 벗겨져 버린 지 오래였다. 단추를 달아 여밀 수 있도록 하면 유용하겠다 싶었다.


실을 고르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써 보고 싶은 실이 있었다. 그라데이션이 특징적인 '기자 샤벳(Giza Sorbet)'이다. 은색과 파란색이 섞인 실로 파도 무늬를 뜨면 햇살 아래 부서지는 파도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도안이랄 것도 없었다. 책에 실린 그대로 시작 코를 잡고 단말기 세로 길이의 두 배만큼 뜬 다음 반으로 접어 양옆을 잇는다. 앞면 위에는 단추를 달고, 뒷면은 맨 마지막 짧은뜨기 단에서 사슬을 5~7개 떠서 고리를 만든다.


당초 상상도. 그림으로 그려 놓으니 딱 봐도 말이 안 되는데(...)


그럴싸한 계획이라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하지만 반쯤 떴을 무렵, 나는 내 공간지각능력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걸 깨닫고 만다.


옆으로 접으면 모를까 위아래로 접으면 입구 부분의 패턴이 이어지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왜 처음에는 몰랐을까.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다시 고민에 빠졌다. 원통 뜨기를 한 다음 아래를 꿰맬까. 타원형 뜨기로 얇고 긴 타원형을 만든 다음 단을 올릴까. 같은 모양으로 앞뒷면 두 장을 뜨고 아랫단 코를 주워 일직선이 되도록 한 다음 각 모서리를 잇는 방법도 있다.


많은 니터들이 그렇듯 나 역시 도안에서 '편물 잇기'라는 구절을 발견하면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리곤 한다. 대바늘로 바텀업(bottom-up) 방식과 탑다운(top-down) 방식 양쪽 다 떠 봤는데 탑다운 방식이 압도적으로 수월했다. 때문에 가능한 한 잇는 면적을 줄이고 싶었다.


문제는 원통 뜨기 혹은 타원형 뜨기로 만들더라도 내가 원하는 형태를 구현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도안 없이 만든 만큼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이는 없었다. 과묵한 장인을 닮아 마음에 들었던 패턴 북도 이번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다.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다.


진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압력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는 것뿐이다. 그가 선택하는 방식이 곧 그의 존재를 설명한다. (로버트 맥키,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p.158)


호기로운 도전과 한 번의 푸르시오. 시나리오는 절정에 이르렀다. 내가 고르는 선택이 '나'라는 캐릭터를 설명한다. 결국 수고를 감수하더라도 안전한 길을 가기로 했다. 앞뒷면 두 장을 각각 떠서 세 모서리를 잇기로 한 것이다.


'재미없는 캐릭터로군.' 책을 탁 덮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그치만 뭐 어쩌겠는가. 내 시간은 소중하고 푸르시오를 거듭할 때마다 라면 면발처럼 꼬불꼬불해지는 실을 보는 건 가슴 아픈 일인걸.


우여곡절 끝에 완성


나와 K군은 둘 다 여행을 대단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매년 여름 국내나 가까운 해외 도시 중 한 군데를 정해 2박 3일만 다녀와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올해는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그마저도 갈 수 없을 것 같다.


바닷가 카페에 앉아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를 내려다 보며 책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올해는 파도를 닮은 파우치에서 전자책 단말기를 꺼내는 선에서 타협하려 한다.


그나저나 다음엔 뭘 떠 볼까. 도안은 없어도 된다. 중요한 건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필요'를 구체화하는 것이니까. 내게는 아직 99개의 패턴이 더 남아있다.





실: 기자 샤벳 실버블루 2겹

바늘: 코바늘 모사용 6호

도안: <かぎ針あみの模様(코바늘 패턴) Ⅲ> 99번 패턴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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