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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May 27. 2020

서른에 처음 배우는 코바늘

코바늘 오답노트

작년까지만 해도 내게 있어 뜨개질은 '겨울의 전유물'이었다. 뜨개질 실은 곧 털실이었고, 코바늘은 편물 잇기와 마무리에나 쓰이는 낯선 물건이었다. (그나마도 코바늘을 배우기 싫다는 이유로 돗바늘을 고집했다) 면사나 마사, 아크릴사 등이 존재할 거라고는, 내가 그런 실을 손가락에 걸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바람이 차가워지면 도톰하고 폭닥폭닥한 실을 장만해 목도리를 뜨기 시작했다. 변형 고무단 목도리부터 자라 목도리까지, 매년 짠 하고 나타나는 새로운 무늬들은 대체 누가 개발하는 건지. 목도리만 떠도 지루할 새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봄여름에도 무릎 위에 털실 뭉치를 얹고 목도리를 뜨는 건 뜨는 이에게나 보는 이에게나 고역이었다. 무엇보다도, 완성한 작품을 당장 쓸 수 없다는 사실이 참기 힘들었다.


'그래, 코바늘을 배워 보자.'


맨 먼저 찾아간 것은 도안 없이도 발 매트와 식탁보를 뚝딱 떠 내는 재야의 코바늘 고수, 엄마였다. 하지만 운전과 마찬가지로 뜨개질 역시 부모님께 배울 수 있는 성질의 행위가 아니었다.


"아니, 이걸 왜 못 따라해?"


엄마는 눈 깜빡할 사이에 열몇 개의 사슬을 만들었다가 휘리릭 풀어냈다. 이번엔 잘 보고 따라하라며 다시 한번 사슬을 만들었지만, 바늘이 어디로 들어가는 건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몇 년 전이라면 포기하고 말았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유튜브가 있다. 재생 속도 조절과 일시 정지가 가능한 유튜브 말이다. 마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니 프레임 단위로 일시 정지를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비장한 각오로 코바늘 기초 패키지를 주문했다.


목도리를 뜨는 데 사용하던 털실의 절반도 되지 않을 굵기의 실을 보자 코바늘을 배운다는 게 실감났다.


손가락에 실을 걸고 사슬을 뜬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사슬뜨기 시작코를 주워 첫째 단을 뜨는 것이었다. 18코로 시작했는데 왜 10코로 줄었지? 아, 한 코씩 건너뛰어서 그렇구나. 다시 뜨니 이번에는 25코가 되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전부 다 뜨고 생각해 보자는 마음에 끝까지 뜬 다음 다른 색 실로 테두리까지 둘렀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특히 세 가지 문제점이 두드러졌다.


크기가 샘플 작품에 비해 훨씬 작다. (4분의 3 정도?)

중간부터 코가 하나 줄어들었다.

테두리 코 줍는 위치가 이상하다.


장력 조절 실패, 이전 단 기둥코 빼먹고 뜨기 등 코바늘 초보가 할 수 있는 실수는 죄다 모아 놓은, 어떤 의미로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이걸 티 코스터로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놀랍게도 티 코스터 패키지였다)


패키지 리뷰에는 처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뿐이었다. 1단부터 쩔쩔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안에도, 영상에도, 실에도 이상이 없다면 어쩌면 문제는 '내'가 아닐까. 나는 실패의 이유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고 있었다.


'서른 살에 뭔가를 배우기 시작한 게 글러 먹은 거야. 지금까지처럼 대바늘만으로도 충분하잖아.'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대바늘 블랭킷 도안을 뒤적였다.



안 되면 돌아가라


포기하려던 참에 엄마가 뜨던 수세미 생각이 났다. 코를 둥그렇게 몇 번 둘러주면 수세미가 뚝딱 완성되었다. 어머니들이 수세미를 몇 개씩 뜨는 건 원형뜨기가 비교적 쉽기 때문이 아닐까? 유튜브 영상을 참고해 원형뜨기에 도전했다.


너도 티 코스터로 쓰긴 글렀다


왕복뜨기와 비교했을 때 원형뜨기는 '1단의 악몽'에서 자유로웠다. 매직링에 첫째 단을 뜨고 나면 v자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나 바늘을 어디에 찔러 넣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유레카'를 외치며 짧은뜨기, 한길긴뜨기, 배색뜨기를 섞어가며 단을 올렸다. 마지막은 엄마가 자주 뜨던 격자 무늬를 떠올려 사슬을 적당히 추가했지만 콧수 계산에 실패해 접시가 되고 말았다.


굵은 실로 숭덩숭덩 뜨다 가는 실을 잡으니 눈이 아팠다. 실이 가늘어서 코가 잘 보이지 않는 게 문제 아닐까. 원형뜨기 연습 겸 남는 실을 털어 영상을 보며 베레모를 뜨기 시작했다. 확실히 실이 굵으니 코도 잘 보이고 진도도 빨랐다.



그냥 초보도 아니고 왕초보인데 게이지를 냈을 리 만무하다. 영상서 알려주는 대로 코를 잡고 단을 떠 갔다. 두근거리는 착용 시간. 거울을 보는 순간 내 모습이라는 것도 잊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사이즈가 작아 머리 위에 냄비 뚜껑을 얹은 모양새였으니까.


사진만 보면 제법 그럴듯했다. 하지만 쓸 수 없는 모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경계, 영상만능주의


다음으로는 배송되어 온 책을 보며 왕복뜨기를 정면 공략하기로 했다. 영상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선생님이지만 실의 종류에 따라 코의 모양이 두루뭉술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다행히 기초 코바늘 책에는 코 모양이 그림으로도 실려 있어 '원리' 자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1단을 뜨는 것도 처음에는 사슬뜨기의 뒤쪽 실과 코산을 함께 줍는 법만 있는 줄 알았는데, 책에는 방법이 세 가지나 나와 있었다. 원하는 편물의 느낌에 따라 하나를 고르면 된다고.


왕복뜨기에서도 자신감을 얻은 나는 티 코스터보다 별 개수가 하나 더 많은 네트백 패키지를 주문했고,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다. 역시나 장력 조절에 실패해 샘플 사이즈에 비해 훨씬 작게 나오긴 했지만, 1단도 뜨지 못 했던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드디어 나 역시 '코바늘을 뜰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맨 먼저 든 생각은,


이제 일 년 내내 뜨개질을 즐길 수 있겠군.


한편으로는 몇 살이 되었든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는 데 있어 늦은 나이란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서른에 코바늘을 처음 잡아서, 뭐? 고민해 봐야 예쁜 여름 가방과 모자를 뜰 수 있는 한 번의 여름을 날리는 것밖에 더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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