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살 만합니다

by 김세로

조그만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방 한 칸. 부엌과 방은 중문으로 분리되어 있어 ‘분리형 원룸’이라고 불린다. ‘집’이라고 하면 어쩐지 민망하지만 굳이 나서서 정정할 건 없는, 그 정도의 공간이다.


지금 살고 있는 건물에는 40여 개의 ‘분리형 원룸’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혼자 사는 사람도 있고, 둘이 사는 사람도 있다. 종종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반려견과 산책 나가던 이웃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요즘 들어 건물 내 화재 경보기가 종종 오작동을 일으키는데, 그때마다 건물 앞에서는 반상회 아닌 반상회가 벌어진다. 예상치 못한 일이니만큼 다들 트레이닝복 혹은 파자마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타난다. ‘또 시작이네’와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가 절반씩 섞인 얼굴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채 걱정스러운 눈길로 건물을 올려다 보는 연인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었다. 나는 내 곁에 선 K군을 슬그머니 쳐다봤다.


나와 K군의 관계는 우리 집을 닮았다. 사귄 지는 7년, 같이 산 지는 4년이 넘었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건 아닌데, 그때마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담배 연기처럼 흐지부지 끝난다.


“돈을 모아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결혼을 해야 돈이 모여.” 월세 문제라면 이미 같이 살고 있으니까 논외.


“식을 올리는 게 싫으면 혼인신고라도 하는 건 어때?” 결혼식 자체가 싫은 건 아니다. 어머니도 내 결혼식을 보고 싶어 하시는 눈치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혼인신고를 한다 해서 바뀔 게 없다. (신혼부부 전세자금대출을 받아서 이사를 가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책임감 없어 보여.” 지금 K군과 함께 사는 게 ‘결혼하기 전에 서로 어떤 사람인지 알아 가기 위해 살아보는 것’ 정도로 보인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 표현 방식의 문제겠지.


전부 한 번 이상은 들어본 말들이다. 악의 없이 한 말이란 걸 알고 있기에 타격은 입지 않지만, 한참 이것저것 생각하게 된다.




집과 방 사이에서 표류하는 우리 집처럼 나와 K군의 관계도 ‘연애’와 ‘결혼’ 사이를 둥실둥실 떠 다니고 있다. 말하자면 ‘연인 초과(‘이상’이 아니다) 부부 미만’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2인 가구가 두 사람의 관계에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라벨을 붙이고 있다. 화재 경보기라도 울리지 않는 한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연애’ 뒤에는 자연스럽게 ‘결혼’이라는 단어가 따라 붙고, 신혼부부의 랜선 집들이는 대부분 20평대, 적어도 10평대 후반에서 시작한다.


언제까지고 ‘연인 초과 부부 미만’의 관계로 지금 이 집에서 살 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수납 공간’이다. 책을 사면 그만큼의 책을 팔거나 내다 버려야 한다. 폼롤러는 둘 곳이 없어 책상 앞 창틀 위에 우뚝 서 있다. 돈이 모이면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생각이고, 그 과정에서 대출 이자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머리를 맞댄 채 혼인신고서를 작성할 것이다. 언젠가는 추억이 될 지금 이 집, 이 관계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