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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Apr 25. 2024

재능에 관한 과학적으로 입에 발린 소리

<이능의 발견>

<그릿(GRIT)>의 시대가 저물고 있습니다.


작년 패션계에서는 잘 관리된 피부와 질 좋은 옷으로 상속자 분위기를 풍기는 ‘올드머니룩’이 유행했고, 일본에서는 가정 환경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의미의 ‘오야가챠(親ガチャ, 부모+뽑기 게임)’라는 단어가 유행어 대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노력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피로감 때문일 것입니다.


자연히 ‘재능’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습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났지만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능력. 발견만 하면 별 노력 없이도 실력이 쑥쑥 느는 능력. 노는 것만큼 즐거운데 돈까지 벌 수 있는 능력.


그런 점에서 <이능의 발견> 뒷표지에 큼직하게 실린 ‘재능은 노력을 뛰어넘는다’라는 문구는 달콤하면서도 절망적입니다. ‘재능’은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뚝딱 써 내려가거나 흥얼거리는 노래마다 명곡이 되는 소수의 전유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왜 재능이 없을까’ 하는 문제로 고민 중인 사람은 책을 집어 들 의욕조차 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재능’은 <드래곤볼> 속 전투력보다는 <죠죠의 기묘한 모험> 속 스탠드에 가깝습니다. 숫자로 표현되는 전투력은 우열을 가리기 쉽지만, 스탠드는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능력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이능(異能)’이라고 부르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드래곤볼>도 <죠죠의 기묘한 모험>도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여전히 모호하기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재능에 관한 선입견과 오해를 깨부수면서 시작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파고들면 재능이 된다. IQ(또는 자신감 또는 긍정적인 사고 또는 끈기) 하나만 있으면 성공이 보장된다. 유전율은 바뀌지 않는 숫자다. 저자는 이러한 통념을 하나씩 부숴 나갑니다. 그 근거는 지금까지 저자가 읽은 10만여 편의 과학 논문입니다.


‘누구나 재능이 있다’라고 말하면 입에 발린 소리처럼 들리겠지. 하지만 듣기 싫은 말이 늘 진실인 건 아니거든. 말하자면 이건 ‘과학적으로 입에 발린 소리’인 셈이지(pp.232-233)


제2부 해결편에서는 워크시트의 빈칸을 직접 채우면서 자신의 이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개념이 ‘텐던시’입니다. 텐던시는 ‘집단 내에서 어떻게 치우쳐 있는가’를 가리킵니다.


‘사교성’을 예로 들어 볼까요. 이때 사교성은 100점 만점일 필요가 없습니다. 직업으로 삼을 만큼 뛰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 사교성이 20점인 직원만 있다면 50점에 지나지 않는 내 사교성도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숫자와 상관없이 집단 내에서 나는 사교적인 방향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개념이지만, 번역 과정에서 가장 골머리를 앓은 단어이기도 합니다. 작업 시작하자마자 포스트잇에 원문인 ‘かたより’를 큼직하게 적어서 붙여 놓았는데, 완역 원고를 보낼 때까지 떼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치우침’입니다. 일본에서도 이 책과 같은 의미로는 거의 쓰이지 않아서 제자가 무슨 뜻인지 묻는 대목이 나오기도 합니다. 낯익은 단어인 ‘재능’이나 ‘이능’으로 옮길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자신이 좋아하지 않거나 서툰 일이라도 다른 사람에 비해 치우쳐 있으면 얼마든지 활용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능숙하다’나 ‘뛰어나다’ 같은 뉘앙스가 담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울기? 편향? 경향? 편중? 여러 단어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편향’은 부정적인 의미를 줄 수 있어 제외했습니다. ‘경향’은 원문의 의미와 가장 가깝지만 ‘~한 경향이 있다’ 같은 문장이 나오면 단어가 중복될 수 있어 제외했습니다.


‘텐던시’는 얼핏 보면 이질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냥선생의 입을 통해 설명이 나오므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동음이의어가 없으므로 다른 단어로 대체하더라도 찾아 바꾸기 기능으로 손쉽게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대화체’를 들 수 있습니다. 책의 주제를 전달하는 ‘냥선생’은 120세라는 설정이라 점잖은 말투를 씁니다. 독자의 생각을 대변하는 ‘제자’는 평범한 20대 직장인이지요. 따라서 소리 내어 읽어도 매끄러울 만큼 자연스러운 대화체로 번역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이름을 가려도 누가 말했는지 알 정도로 두 인물의 말투를 구분해서 옮기도록 노력했습니다.


어디서나 1등을 차지할 만큼 화려한 재능은 없지만, 노력하기에는 갈 길이 멀고, 그래도 내가 속한 집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고 싶다면 냥선생과 제자의 대화를 따라가면서 자신의 텐던시를 찾아 보면 어떨까요. 현실이라는 이능 배틀에서는 하잘것없어 보이는 능력으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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