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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형박사 Mar 25. 2021

아우슈비츠의 조약돌

『다음 칼럼은 90년대~ 00년대 이시형 박사가 젊은이들에게 보냈던 이야기입니다. 약 20년의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젊은이들은 4-50대의 중년이 되었고, 이제 다시 새로운 20대의 젊은이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려고 합니다.  지난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에 비해 지금은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발전했는지, 어떠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해질녘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음침한 공기가 우리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원혼이 서성이는 여기 아우슈비츠에선,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경, 가방, 구두, 머리카락…. 방마다 가득한 그들의 유품들이 차라리 텅 빈 가스실보다 더 아픈 충격이었다. 가스실에 밀려 들어가지 않더라도 평균 2개월도 못 넘긴다는 이곳의 참상은 살아 있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일행이 수용소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동안 나는 한 위대한 인간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내겐 정신의학의 큰 스승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인간 승리의 표본이었다. 빅토르 프랑클. 그 생지옥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다. 정확히 2년 7개월, 그것도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한 상태로 생환해 나온 기적의 인물이다.


▼독가스보다 센 부드러운 가슴▼

어떻게 거기서? 누구나 갖게 되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의 생존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다. 얼른 생각하기에 그런 최악의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강인한 체력과 의지력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부드러운 가슴이 있어야 한다. 즉, ‘감동, 감사, 그리고 나눔’의 심성이 있어야 꺼져 가는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묻는다. 그 생지옥에서 무슨 그럴 일이? 프랑클씨는 조용히 입을 연다. 많더라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살아 있다는 실감, 이보다 더한 감동이, 그리고 감사가 또 있을까? 오늘도 해가 뜨고, 질식할 것 같은 방에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도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 동료의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파면서 문득 바라본 서쪽 하늘의 낙조, “아! 저길 좀 봐!” 옆자리 동료도 삽질을 멈추고 “아! 정말 아름다운 낙조로군”하며 함께 감동할 줄 아는 사람, 비 온 뒤 길에 고인 물에 비친 마른 나뭇가지에도 한 폭의 풍경화를 바라보듯 취할 줄 아는 사람, 밤중 아득히 들려 오는 아코디언 소리에 벽에다 귀를 댄 채 잠을 설치는 사람, 길에서 주운 예쁜 조약돌에 감동하고 감사하고, 이를 고이 가슴에 품고 닦아 몸이 불편한 동료에게 건네줄 수 있는 사람….

끝이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참으로 하찮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하찮은 것들에 대해서도 감동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난다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동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여유, 이런 여린 감성이 그 생지옥에서 살아남게 한 삶의 원천이 되어준 것이다.

프랑클씨는 거기다 매일 유머 한 가지를 만들어 동료들과 나누었다. 사람들은 힘없이 피식 웃는다. 하지만 그게 인간의 마음을 한결 풍요롭게 만든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어쩌면 이게 진정한 유머인지도 모른다.

밤의 어둠을 지켜본 사람만이 아침의 밝은 태양에 감동한다. 온종일 작열하는 태양 아래 시달려 본 사람만이 밤이 주는 부드러움에 감사한다. 우리도 전쟁의 폐허에서 허덕일 적엔 살아 있다는 강한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멀건 죽 한 그릇에도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행인지 불행인지 이제야 모든 게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린 이상하리 만큼 감성이 무뎌진 것 같다. 웬만한 일에 감동할 줄 모른다. 있는 게 당연한 세상이라 감사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워낙 자기 일에만 넋이 빠져 이웃은 안중에도 없다. 확실히 살기 좋아지긴 했는데도 사람들은 더 힘들고 어려워졌다고 늘 불평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정말 세상이 힘들게 된 건지, 아니면 우리 가슴이 메말라 빠진 탓인지.

수용소에서 나와 버스에 올랐을 때, 끝없는 평원에 펼쳐진 낙조에 넋을 잃었다. 어둡던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내가 거기서 주워 온 조약돌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하고, 이를 일행들에게 차례로 돌렸다. 사람마다 포근히 가슴에 안고 눈을 감은 채 행복해 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조약돌엔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함께 따뜻한 마음이 새겨져 있다. 소중히 갖고 돌아와 ‘나눔 문화’의 김진주 소장에게 맡겼다.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나누어주는 징표로서. 그리곤 언젠가는 다시 아우슈비츠에 돌려줄 것이다. 감사의 편지와 함께. 그날이 빨리 와야 할 텐데.


▼물에 잠긴 터전 ˝좌절은 말자˝▼

하지만 이런 간절한 소망과는 달리 공교롭게도 올 여름, 우린 유례 없는 자연 재앙을 잇달아 맞고 있다. 진흙 속에 묻힌 삶의 터전, 참담하고 허탈한 심경뿐이다. 하지만 좌절하지는 말자. 우린 어떤 역경도 잘 이겨낸 여유와 관록이 있다. 눈물로, 인내로, 그리고 때론 허허로운 너털웃음으로. 그리고 우리에겐 아픔을 함께할 줄 아는 따뜻한 이웃들도 아직은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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