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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형박사 Aug 18. 2021

대관령 옛길엔 정이 흐르고

『다음 칼럼은 90년대~ 00년대 이시형 박사가 젊은이들에게 보냈던 이야기입니다. 약 20년의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젊은이들은 4-50대의 중년이 되었고, 이제 다시 새로운 20대의 젊은이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려고 합니다.  지난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에 비해 지금은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발전했는지, 어떠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여름엔 동해로 가겠다는 사람들이 가장 많다. 거길 가자면 아슬아슬 대관령을 넘어야 했는데 이젠 터널이 뚫려 아주 쉽고 빨라졌다. 그러나 피서객이 몰리면 속절없이 터널에 갇힐 각오쯤은 해야 한다.

꼭 그래서 옛 길을 권하는 건 아니다. 백두대간 정상에 걸터앉아 멀리 동해, 발 아래 웅장한 산세를 바라보노라면 가슴에 호연지기가 요동친다. 그것만으로도 상쾌하다. 천천히 차를 몰아 구불구불 고갯길을 내려가노라면 길을 가로지르던 다람쥐가 신기한 듯 쳐다본다.

길엔 차라곤 없이 한산하기 때문이다. 터널이 뚫리기 전 여기를 넘는다는 건 고역이었다. 매연, 브레이크, 큰 차들의 굉음, 목숨을 건 전쟁이나 치르듯 쫓고 쫓기는 신경전. 그 무시무시한 길이 이렇게 한가롭다니 믿기지 않는다.


▼역사 문화 밴 ´대굴령´▼

조금만 내려오면 반정터를 만나게 된다. 거기가 가장 전망이 좋다. 잠시 쉬었다가 굽이굽이 다르게 펼쳐지는 경관을 즐기면서 그대로 내려가는 것도 좋고, 아니면 엄마가 차를 몰고 내려가고 아빠는 아이들과 함께 괴나리봇짐 진 옛사람들의 옛길을 따라 내려가 보자.

여기가 진짜 대굴령이다. 대굴대굴 구른다 해서 붙여진 대관령의 옛이름이다. 서낭당, 그리고 신사임당이 어머니를 남겨 두고 서울 남편 찾아가면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간절한 마음을 노래한 사친시(思親詩) 시비 앞에서 걸음이 멎는다.

외길 따라 내려오노라면 계곡이 점점 깊어져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적송이 그 위용을 뽐내고 서 있다. 올려다보노라면 숨이 멎는다. 어슬렁거려도 한 시간 남짓, 삼포암을 지나 대관령박물관으로 길이 열린다.

박물관장의 안내 설명에 취한 엄마가 더듬더듬 조상의 생활 유품 이야길 들려 줄 것이다(꼭 관장의 설명을 청해 들어야 한다). 그럴 즈음이면 새 길이 나면서 단절된 역사의 숨결이 다시 이어져 오는 흥분에 젖게 될 것이다.

새 길, 좋지. 시원스레 곧게 뚫린 4차로 도로는 편리하고 빠르다. 하지만 거기엔 길을 가는 맛도 멋도 없다. 옛 길엔 옛사람의 정한이 서려 있다. 강줄기처럼 땅 생긴 모양대로 산모퉁이 따라 굽이굽이 자연스레 열려 있다. 한국적 정취가 물씬 난다.

이렇게 아름다운 옛 길에 4차로 도로라는 폭군이 난도질을 해댄 것이다. 잘리고 헐리고,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못내 아쉽다. 역사도 문화도 없는,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길이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지금쯤 도로공사가 없어져도 되지 않을까. 그만하면 됐다. 새 길이 나면 옛 길 따라 생긴 온갖 문화시설이 고스란히 폐허로 되어 버린다. 환경 파괴만인가. 문화, 역사를 깡그리 망가뜨린다.

이야기가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 다시 대굴령으로 돌아와서, 재가 끝날 즈음이면 어흘리를 만난다. 어흥! 호랑이가 먹고 남긴 것만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넉넉한 마을이다. 어떤 노인이든 잡고 한두 가지 이야기를 청해 듣는 것도 잊을 수 없는 맛이다.

거기서 정선 방향, 우측으로 차를 몰면 왕산 폐교 뜰에서 젊은 조각가 부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외국에서 온 젊은 예술가들의 야심찬 작품과 어울려 환상적인 예술촌으로 변하고 있다. 놓칠 수 없는 곳이다.

그 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정동진으로 갈 수도 있지만 어흘리에서 강릉으로 들어가면서 시골장도 그냥 지나칠 순 없다. 주부가 아니라도 대관령 산나물에 침이 넘어간다.

조심할 것은 욕심이 난다고 바구니째 떨이할 생각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할매는 거기 앉아 오가는 사람도 구경하고 팥죽도 사먹고 해야 하는데 그 낙을 앗아가겠다니. 그리고 할매가 몽땅 팔지도 않는다. 감주 장수 꼬부랑할매는 아들이 미국 유학 중이라고 대단한 기염이다. 뒤에 3층 자기 집을 두고 노점에서 과일을 파는 할매는 맨손으로 노루를 잡은 관록이 있다. 해질 녘이면 대학교수 아들이 차를 몰고 채소 행상 노모를 모시러 온다.


▼천천히 ´나´를 찾아보자▼

여길 어찌 지나치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우린 너무 목표 지향적이다. 빨리 목적지에 가야 한다는 가히 강박증적 집착에 빠져 있다. 어딜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가느냐다. 목적지까지 오가는 길을 어디로 할 것인지, 무엇을 보고 즐길 것인지도 함께 연구해봐야 한다.

실은 여기에 더 중점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것도 여행의 맛이다. 여름 해수욕장, 어딜 가나 인파에 시달린다. 바가지나 안 쓰면 다행이다.

그게 좋다면 서둘러 가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사는 맛이랴. 더구나 휴가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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