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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골 일기

일곱 번째 일기 : 고난의 행군 시작...드디어 농삿일에 동원되다.

by 꿈꾸는작가 윤효재

정확히 기억은 나진 않지만 난 초딩 저학년까지는 농삿일에 강제 동원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빼빼 마른 체격에다가 힘도 별로 없으니 농사에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일하러 가자!!?".

아이들과 뛰어놀기 좋아하던 나에게 인생 최악의 멘트를 듣게 된다.

'일???' 이제 나의 봄날은 봄바람과 함께 저 멀리 실려 가버렸다.


방과 후나 주말에 농삿일에 끌려 간다는 게 너무나 싫었다. 놀아야 되는데 일이라니!! 그당시 농사를 짓지 않던 또래 친구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학교 끝나고 멀리 있는 논으로 향하는 길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아버지에게 자식인 우리는 노동력으로서 쓸모가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농촌에서는 농삿일을 시키기 위해 자식을 많이 낳았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딸보다는 아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3남 2녀였다. 나는 막내.


봄에 모내기, 여름에 논에 농약치기, 가을에는 수확.

지금이야 농사도 기계화, 전문화 되어 농삿일이 쉽게 느껴지지만 그 당시는 가내수공업처럼 일일이 손을 거 치는 경우가 많았다.


모내기는 직접 허리를 굽혀가며 모를 심었다. 북한의 '허리 안펴기 운동'을 직접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이앙기는 아니지만 수동으로 모를 심는 도구가 있었는데 자동이 아니라서 힘으로 하려니 힘들었다. 한 번은 따가운 햇살아래 모내기 하다 그다음날 목이 따가워 거울을 보았다. 목에 피부가 벗겨져 뱀 허물벗은 흉칙한목이 되어 있었다. 이앙기가 있었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을 텐데...

봄에 모내기가 끝나고여름이 되면 병충해 방지를 위해 농약을 쳐 주어야 한다. 큰 고무다라이에 물과 농약을 섞어 가득 채운 다음 수동으로 농약을 뿌렸다. 그러다 나중에는 경운기 동력을 이용해서 농약을 쳤지만 여름 땡볕에 일하는 게 힘들었다. 지금은 드론으로 공중에서 농약 뿌리는 걸 보고 신기해 했다. 저런 게 진작에 나왔어야 되는데.. 빨리 좀 발명하지!!

농약 치기


가을엔 벼가 다 자랐으니 수확해야 하는데 이때가 할 일이 많았다. 직접 낫으로 일일이 벼를 베었다. 역시 허리가 아픈 일이었다. 벼를 벤 후 일정량의 벼를 묶어서 볏단을 만들어야만 했다. 묶었으면 이 볏단들을 모아서 쌓아야만 했다. 그리고 벼에 곡식들을 털기 위한 타작! 이 타작을 하다보면 볏단에서 나오는 엄청난 먼지들이 옷이나 얼굴에 달라붙어 세수할때면 얼굴이 따가웠다. 콧구멍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콤바인만 있었어도 낫으로 벼 벨 일 없고, 벼를 묶을 필요도 없으며, 곡식을 따로 털 필요도 없었다.

이앙기, 드론, 콤바인 이런 거라도 있었으면 그당시 농삿일을 할 만 했을텐데. 시대를 빨리 태어난 게 죄였다.

아! 빈농(貧農)의 슬픔이여!!


가을 걷이가 끝나면 정부에서 쌀을 사드리는 쌀 수매를 한다. 여기서 받은 돈으로 학비를 충당하고 집안에 필요한 돈을 썼다.

옛날 탈곡기
탈곡기로 타작하는 모습

여기까지가 대략의 논농사 과정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독자들이 농삿일에 대해 너무 부정적 생각을 가질까 싶어 참는다.

밭농사도 있었다. 고구마, 감자, 마늘, 고추 등 중간 중간에 나를 괴롭히는 놈들이었다.

겨울은 농사를 짓지 않아 좋았다. 하지만 비닐하우스가 나오면서 이 나쁜놈이 겨울에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러던 중 대반전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농사를 짓지 못하시고 땅은 자식들에게 물려주셨다. 드디어 몇 십년 농삿일에 강제 동원한 댓가가 빛을 발하는구나! 위치가 좋지 않아 그리 비싼 땅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청춘을 바친 기막힌 댓가였다.


할 일 없으면 실없는 소리로 시골가서 농사나 지어야지. 제발 이런 말을 하시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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