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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골 일기

여덟 번째 일기 : 연탄의 추억...죽음의 문턱을 노크하다!

by 꿈꾸는작가 윤효재

당시 우리 시골에서는 아궁이 나무로 군불을 때어 온돌방을 따뜻하게 데웠다. 온돌이 과학적이라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새삼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을 했다.

하지만 군불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한쪽 방바닥 장판만 시커멓게 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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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군불 연탄 보일러

그러다 우리집도 드디어 연탄 보일러를 설치를 했다. 당시에는 나무에서 연탄이라는 최첨단? 난방 방식이었다. 물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어 좋았다. 그전에는 가마솥에 엄마가 군불 때면서 물을 데웠다.

"왕표 연탄!!!" 1967년 부산에서 설립하여 지금의 경동나비엔으로 유명한 경동그룹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쪽 사원들은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시를 잘 실천할 것 같다.)


연탄하면 항상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이라는 아기공룡 둘리에서 마이콜 노래가 생각난다.

"꼬불꼬불~꼬불꼬불 맛좋은 라면/ 라면이 있기에 세상 살맛 나/ 하루에 열 개라도 먹을 수 있어 /

후루룩짭짭~ 후루룩짭짭~ 맛좋은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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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집 연탄은 구멍이 아홉개가 아니고 훨씬 많았는데 왜 구공탄이라 부르지?" 어렸을때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연탄이 초기에는 구멍이 아홉게 였고 그뒤 구멍이 많아졌다고 한다. 또 한가지 안 사실은 구공탄은 화력 부족으로 라면을 끓이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한다. 구멍이 많아야 화력이 강하고, 대신 강한 만큼 연탄이 빨리 소모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새벽마다 부모님이 연탄을 간다고 고생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방이 따뜻했던 이유가 부모님의 고생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우리집은 22구공탄

연탄 소비가 늘어나니 텔레비전에서는 연탄가스 조심하라고 공익광고가 자주 나왔고, 뉴스에서도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자주 나왔다.

하지만 다른 집 이야기이거니 하고 난 무시했다.


그러던 어느날 휴일, 낮에 방에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껍고, 점점 숨쉬기가 곤란했다. 방문을 열고 좁은 마루에 누워 죽을 듯이 아무말 못하고 몇 분 동안 몸을 배배 꼬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탄 가스 중독인지 몰랐던 것이다. 죽는 것이 이런거구나!! 하고 건너편 방에 가족이 있었는데도 나는 바보같이 소리도 지르지 않고 있었다.

겨우 바깥 공기를 마시며 위기를 모면했고, 연탄 가스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벽 갈라진 틈으로 연탄 가스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 뒤에도 연탄 가스를 마셔 결국 학교에 결석하고 말았다. 병원도 가지 못하고 촌에서 민간요법으로 김칫국물 마시면 괜찮다고 해서 벌컥벌컥 마신 게 응급치료였다.

그 다음날 학교에 가니 아이들은 내가 죽음의 문턱까지 노크하고 온 사정도 모른 채

"배가 고파서 연탄 가스 마셨나?", "니 혼자 원샷하니까 그렇지!"하며 얄밉게 놀려대곤 했다.

아이들은 나의 연탄 가스 흡입을 한 잔의 추억으로만 치부해버린 것이다.


다 타버린 허연 연탄은 또다른 쓸모가 있었다. 추운 겨울에 마당이나 집앞에 얼음이 얼면 연탄을 깨뜨려 허연 재를 깔아 미끄러지는 걸 방지했다. 그래서 나도 착한 일 한답시고 겨울에 집앞이 얼자 연탄재 깔았다가 한 소리 들었다. 멀쩡한 검은 연탄을 깔아버린 것이다.

또한 동네 모퉁이에 허연 연탄재가 쌓여 있으면 나와 아이들은 좋은 놀잇감이라 포착을 하고 태권도나 축구하듯이 발로 차며 놀았다.

연탄재 발로 함부로 차지 맙시다.










지금은 고깃집에 가면 연탄을 볼 수 있다. 연탄을 보면 따스한 추억과 함께 무서움의 악몽도 같이 떠올랐다.

그런데 뉴스를 보니 아직도 달동네 같은 곳에서는 연탄을 사용하는 걸 보고 왠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제발 그들한테는 연탄 가스 중독으로 뉴스에 나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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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나눔하는 아이들 고깃집 연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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