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일기: 금지된 장난..집에 불을 내다...
기억하기 싫은 부끄러운 얘기지만 어렸을 적 난 우리 시골집에 불을 낸 적이 있다.
여긴 시골 부엌. 당시에는 가스레인지가 없어서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때어 가마솥에 밥을 했다. 그래서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한가득 넣기 위해 시골 부엌은 제법 클 수밖에 없었다. 부엌문 옆에는 아버지가 둥글고 큰 장작을 도끼로 패서 쌓아 놓기도 해서 부엌에 불을 피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난 장작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냥으로 신문지에 불을 붙여 장작을 태우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부엌 안으로 들어왔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가 붙어 있는 얇고 긴 땔감들이 있었다.
'이 나무들이 정말 잘 탈까??' 속으로 난 의심이 들었다. 빽빽하게 쌓여 있는 나무들 사이로 솔방울과 말라빠진 솔잎들이 엉켜져 있었다. 성냥통을 왼손으로 집어 들고 오른손으로 성냥 한 개비를 꺼냈다. 위에서 아래로 대각선으로 쭈욱 그었다. "칙"하며 성냥의 붉은 대가리에 불이 붙었다. 그 불에 미리 준비해 온 신문지 쪼가리를 갖다 댔다. 쪼가리에 불이 옮겨 붙자 난 뜨거워 바로 바닥으로 놓아버렸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순식간에 신문지 쪼가리는 나무를 부추기듯 불로 물들이고 있었고, 덩달아 허연 연기도 신이 난 듯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부엌문 밖을 휘젓고 있었다.
난 급히 신문지와 불타는 나무를 발로 밟았으나 불을 꺼지지 않았다.
'이거 큰 일이다!' 이제야 위험을 직감한 것이다. 불이 붙더라도 잠깐이면 혼자서도 끌 수 있다는 어이없는 자신감이 큰 일을 내고 만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어려서 금지된 장난이란 걸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부엌에 나무는 점점 불이 붙고 있는데도 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불이야!!"라고 크게 외치면 되는데 그냥 보고만 있었다.
불행 중 다행히 큰 방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연기가 자욱한 걸 알아차리고 문밖으로 나와서는 "불이야!!"라고 내 대신 크게 외치셨다.
신기한 건 바로 그다음이다.
"불이야!!" 그 소리가 동네 전체에 채 퍼져 나가는 동시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동네 사람들이 바께스를 들고 우리 집으로 총출동했다는 사실이다.
5분 대기조의 활약상 같았다. 마치 불이 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잽싸게 불을 끈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집 바로 옆에 동네 우물이 있어서 물을 길어 오기가 쉬웠다.
찌그러진 양철 바께스가 물을 가득 실은 소방차를 대신하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소방관이 된 것이다.
소방서보다 더 빠른 대처능력, 평소 훈련도 하지 않았는데 저렇게 빠르다니! 지금 같으면 바로 sns에 난리가 나서 숨은 영웅들이 됐을 것이다.
이게 가능한 건 바로 시골 농촌이라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공동체에 익숙한 시골 사람들의 정이 아닐까 싶다. 옛날 시골에서는 옆집 소새끼가 몇 마린지는 훤히 알 정도니 얼마나 서로 돕고 잘 살았겠는가? 그래서 이웃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도와주던 게 일상이었던 것이다.
아마 지금도 "불이야!!" 소리치면 5분 대기조처럼 이웃들이 바로 밖으로 다 나온다. 하지만 다들 딴 데로 흩어져 달아난다. 이게 그 당시 시골과의 차이점이다.
불은 껐지만 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변명하지?'
그 불로 부엌에 나무가 불에 탄 건 물론이고 당시 도란스라 불렀던 변압기가 고장 났다. 아버지는 읍내에 가서 새 변압기를 사서 어깨에 짊어지고 오시면서 나를 쬐려 보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하다. 크게 야단치시지는 않았지만 그 원망의 눈빛에 난 주눅이 들고 말았다.
어른이 되고 지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이 얘기를 하니, 아는 형님도 어렸을 때 자기도 불을 낸 적이 있다고 해서 나에겐 잠시나마 위안이 되었다.
'음... 나만 멍청한 짓을 한 게 아니구나!'
그나마 집에서 금지된 장난을 한 게 다행이지 산에서 했더라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여러분!! 상투적인 얘기지만 진짜 "자나 깨나 불조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