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세번째 일기 : 묘사와 떡보따리
"가서 떡 마이 얻어 온네이!"
추석이 지나고 음력 10월이 되면 문중에서 묘사를 지냈다.
난 속으로 '추석때 차례 지냈는데 왜 또 제사를 지내지?"
추석때는 4대 정도까지만 지냈지만 묘사는 먼 윗대 조상까지 한꺼번에 모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 같았다.
지금도 이름 있는 집안은 하고 있다. 먹을 걸 잔뜩해서 문중마다 만들어 놓은 가묘같은 게 있었다. 마을에 같은 성씨가 몰려 살면 아예 마을 근처에 제실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낸다.
이때가 되면 같은 성씨 중에서도 본관이 같은 집안이 모여 제사를 지냈는데 1년에 한 번씩 만나는 분들이라 친척인지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어렸을때 우리에게 중요한 건 묘사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바로 떡이다!' 묘사가 끝나면 구경하러 온 아이들에게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눠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동네에 근처에서 묘사 지내는 집안이 있으면 바로 떡보따리를 준비해서 같이 따라가곤 했다.
엄마는 그때 유치원 가방(유치원도 난 중퇴했다)은 챙겨주진 않지만 떡보따리는 챙겨주며
"많이 얻어 온나!"하며 의무적으로 남의 묘사에 출정시켰다. 나와 아이들은 비장한 각오를 하며 허리엔 칼 대신 떡보따리를 둘러메고 따라나섰다.
"내 보따리가 더 크데이!"
"아이다! 내끼 더 크다. 함 재보까?"
"보따리만 크면 뭐하노? 떡을 많이 얻어 와야제!"
차례 지내듯 큰 판위에 온갖 먹을 것과 직사각형의 창호지 지방(紙榜)에는 도저히 해독이 안 되는 한자를 적어 놓았다.
'도대체 저 암호는 뭐란 말인가?' 몇 년째 미스터리였다.
서열대로 줄을 서서 차례가 시작되었다. 우린 전혀 관심이 없다.
'제발 빨리 끝나다오.'뿐이었다.
"유세차~ 어쩌고. 저쩌고, 학생부군 신위~어쩌고. 저쩌고"
'잉?, 학생???'
'우린 내년에 입학하는데?'
'주문 그만 외우고 빨리 끝내심이...'
드디어 끝났다.
우린 '우루루' 떡 앞에 몰려들었다.
"줄서야 될 거 아이가? 학교에서 배웠다이가!" 어르신이 호통치신다.
'우린 내년에 입학한다니깐요!'
어른들은 당연한듯 아낌없이 먹을 걸 주었다. 그것도 떡은 보따리에 또 싸주셨다.
못살았지만 이때만큼은 시골 인심이 좋았다. 떡보따리를 등에 대각선으로 둘러메고 자랑스럽게 귀환하는 우리의 모습은 전장에서 승리한 장수와도 같았다.
자랑스럽게 대문을 통과한 나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떡보따리를 "딱!"펼쳐 보였다.
엄마는 '오늘 한끼는 해결했다.'는 흐뭇한 표정.
이젠 시대가 변하면서 묘사도 사라지고 있다. 1년에 한 번씩 잘 알지도 못하는 문중 사람들을 보는 건 어색하다. 아버지 살아 계실때야 어르신끼리 잘 알았지만 우리 세대야 묘사가 굳이 필요없다는 걸 느꼈다.
아마 지금쯤 우리 가문의 묘사 지내던 그 터도 허름하게 변해 흉가처럼 되어 있을 것 같다.
"우리 가문이 윤보선 대통령이 나오고......우리 집안이 해평 윤씨 6방 처사공파 몇 대손'이라며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우리 아버지.
난 속으로 '파평 윤씨도 아니고 해평 윤씨?, 재임기간이 짧았던 윤보선 대통령을 지금 아이들은 잘 알지도 못할텐데.... 윤봉길이 우리 가문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이제 묘사는 그들 가문만의 잔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