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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련 Sep 21. 2022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

점심시간에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혹시 지금 전화통화가 가능하냐’고

그래서 바로 나가서 전화를 했다.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었던 말은,

오늘 큰 이모부님이 병원에서 면회가 되는

마지막 날이 될 거 같으니 어머님이 남편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지금 상황을 얘기하며 나와 병원에 가볼 수 있겠냐고 물어보셨다고 했다.


전에 얘기를 들었을 땐, 이모부님이 췌장암에 걸리셔서 계속 치료를 받고 계셨고, 치료를 힘들어하시긴 하셔도 워낙 평소에 운동도 많이 하시고 건강하게 몸을 챙기셔서 치료도 잘 받고 계시며 일도 간간히 하신다고 전해 들었었는데 불과 1-2달 전, 갑작스레 몸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입원을 다시 하셨다고 들었었다. 그런데 그 얘기 들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마지막일 수도 있다니.. 마음이 좀 혼란스러웠다.


어머님께 나이 차이가 있는 이모님은 엄마 같은 존재였다고 들었다. 내가 결혼할 때 결혼 전에 인사도 직접 드렸었고 결혼한 후 첫 명절에 가서 찾아뵙고 밥도 먹었었다. 그 이후에는 얼굴을 뵙거나 하진 않았지만, 어머님과 아버님을 통해 이모님과 이모부님이 두 분께 어떤 존재인지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큼 큰 힘이 됐었는지를 간간히 듣는 정도였다.

물론 나는 그 깊이와 정도를 다 알지 못하지만,

‘큰 도움을 주신 분들이구나’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었고 굳이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왜냐면 내 마음에 이모님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이 있어서 대놓고 티를 낼 순 없으니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었다.


남편과 결혼을 결정하고 어머님 아버님께 인사드리러 처음 간 날. 집에 가보니 어머님 아버님만 계신 게 아니라 이모님이 딱 앉아계셨었다.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흠.. 이게 뭐지..? 왜 미리 말씀 안 해주셨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른들이시니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좋게 넘겼다.


이모님은 어머님과 다르게 성격이 화통하시고 시원시원하셨다. 그래서 생각나는 얘기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가감 없이 표현하시고 뒤끝도 없으신 분이었다. 처음 인사드리러 갈 때는 이모님의 말씀이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고 그런 표현들이 좋지 않게 다가왔었다. 본인이 아끼고 사랑하는 조카인 남편이 결혼한다고 부인될 사람을 데려왔으니 기쁘셨을 거 같았다. 남편 칭찬도 많이 하시고 어머님 아버님 칭찬도 많이 하시고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 건 괜찮았다. 나는 사회생활하면서 어른들을 많이 대했었고 다른 사람 얘기 경청하는 건 내가 잘하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자꾸 뭔가 우리 조카 같은 사람이 없다라는 말씀을 반복하시는데 처음에 몇 번은 그냥 그러려니 넘기는데 계속 들으니 불편해졌다.

그리고 아직 남편과 내가 결혼하기 전인데도

이모님 댁 아들은 신혼여행 가서 아이를 바로 가졌다며 아이에 대한 압박도 은근히 하시는 것 같이 느껴져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말들이 내가 나이가 적은 상태에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서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담을 많이 느끼고 있던 시기라 다른 사람의 별 뜻 없는 한 마디에도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있긴 했다.처음 만났는데 그런 얘기를 서슴없이 하시는 게 듣는 나로서는 어른이기에 그냥 넘기려 했지만,불편하고 불쾌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들었던 얘기지만, 결혼식 당일에도

내가 폐백 하려고 뒤에서 한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중에 폐백실에서 엄마와 이모님이 두분만 잠깐 있게 되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모님이 옆에 도와주시는 분들 다 계시는데 큰 소리로 우리 조카 같은 남자가 없다면서 여자 쪽은 결혼 잘하는 거라는 식으로 얘기하셨다고 엄마가 그 얘길 듣고 거기서 본인 마음이 조금 불편하셨던 얘기를 해서 내가 이모님 성격이 원래 좀 화통하신 거 같다고 말해주고 엄마 마음을 살펴줬지만 사실 내 마음 속으론 기분이 나빴었다.


우리 엄마 아빠도 열심히 살면서 나를 풍족하게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귀하게 키우셨을 터, 상대방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그런 말들을 그냥 하신 것들이 배려가 없다고 느껴졌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이모님에 관련한 모든 일들엔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었다.


남편과 결혼 후, 첫 명절에 어머님이 말씀하셔서

이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날.

남편과 이모님댁 가기 전까지 엄청 싸웠다.

나는 이모님댁에 가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는데

남편은 인사드리러 가니 좋은 선물을 사서 가고 싶어 했다. 선물을 사서 가는 건 그래 그렇다 치는데 비싼 선물을 사서 가는 게 마음에 거슬렸다.

결혼 전에도 선물드리고 식사를 대접했는데 결혼 후에도 백화점에서 한우를 사서 가자는 남편 말이 안 그래도 이모님에 대해 좋지 않은 내 마음과 부딪히면서 싸우게 되었다. 결국 그동안 쌓아왔던 마음들이 터져버렸고 나는 이모님에 대해 안 좋은 말들을 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인사드리러 갔던 기억도 있다.이모님은 결혼하고 아끼는 조카가 부인과 집으로 인사 온다고 명절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셨는데 나는 가기 전부터 밥은 먹고 싶지 않다고 남편한테 말해놨었다. 그런데 가서 보니 그래도 어른이 그렇게 준비하셨는데 밥 한 끼 안 먹고 가는 게 또 마음에 걸려서 조금이라도 먹고 좋게 인사드리고 왔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이모님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들이 있었는데 병문안을 가게 된 것이다.


남편과 퇴근하고 병문안을 가는데 몸이 피곤하기도 했고 병문안하는 병원이 처음 가는 곳이라 병실을 찾는데도 한참 걸렸다.

병원 입구에서 면회 왔다고 들어가려는데 코로나로 인해 미리 예약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서 방문자를 확인하는데 어머님이 미리 예약해뒀다고 했던 우리 이름은 없었다.

순간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병원을 찾으려 헤매면서 와서 다리도 아팠기에 기분도 좋지 않아 졌다.

나는 남편에게 어머님께 전화해보라고 했고

남편은 잠깐 생각하더니 앞에서 안내하시는 분께 간호사실 번호를 물어 전화해서 면회 신청했는데 예약자 성함에 없으니 다시 확인 부탁한다고 말하며 기다렸다. 나는 ‘어머님이 예약하셨다며 어떻게 된 거야?’라는 말이 입술까지 차올랐지만, 면회하러 온 거니 좋게 넘기자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곧 예약자 명단이 확인돼서 면회하러 병실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중에도 내 마음을 끊임없이 다스렸던 거 같다.


병실에 도착하니,

누워계신 이모부님을 보는 순간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많은 교류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건강하시고 부지런하셨던 모습을 기억하기에 그동안의 치료로

몸이 야위시고 수척해지신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젠 누구를 알아보지도 못하시는 것 같았고

이제 숨을 쉬는 순간이 얼마 남지 않으셨단 생각도 직감적으로 들었다. 이모부님을 옆에서 간호하신 이모님도 얼굴이 많이 상하신 게 눈에 보였다.

‘그동안 옆에서 간호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아팠다. 이모님은 우리가 오니 너무 반가워하시고 고마워하셨다. 어떤 얘기로도 위로가 될 수 없으니 그냥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얘기를 들어드리는 게 다 인 것 같았다.

이모님이 그동안 얘기하시면서 이제는 모든 걸 초연하신 듯이 얘기하시는 그 모습도 이제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먹먹해졌다. 내가 이 정도인데 어머님 아버님은 얼마나 마음이 슬프실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모부님 나이는 75세.

우리 아빠와 아버님이 동갑이시니 두 분과는 5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셨다.

사람이 사는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구나 사람의 마지막은 연약하구나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삶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거구나 라는 여러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모님과 대화를 하는데, 그동안 이모부님을 병간호하시면서 잠도 잘 못 주무시고 힘드시고 슬픈 마음이 있으심에도 여전히 시원시원한 말투로 본인 성격이 남자 같다며 셀프디스를 하시며 우리에게 이런저런 말씀하시는데 예전엔 그런 말들에 내가 기분 나쁘고 마음 상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걸리는 게 없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이모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도 많았고 내가 보고 느낀 단 면으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들로 사람을 판단하고 생각하니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의 나의 생각과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어느 누구도 누구를 판단할 수 없고

모든 사람 각자 개인마다 살아온 저마다의 삶의 시계가 있고 상황이 있다는 것을.

그 사람 고유의 특색이 있어서 표현하는 방법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는 것을.

다른 것이지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게 아니라는 것을.


이모님은 이모님 나름대로 우리가 반갑고 좋은 표현들을 투박하고 서툴지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으로 하셨다는 걸 이제는 내가 조금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았다. 투박한 표현 속에 우리에 대한 애정을 넣어 말씀하시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짧다면 짧은 시간 면회를 하고 집에 가려는데 이모님은 우리가 퇴근하고 밥도 못 먹고 면회 오신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밑에서 밥이라도 사주시겠다고 따라 나오시는데 정말 괜찮다고 들어가 보시라고 인사드리며 나왔다. 병원 나와서도 어머님이 전화 오셔서 퇴근하고 밥도 못 먹고 고생 많았다며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또 마음에 맴돌았다.

어머님이 밥 먹고 가라고 하면 너네 집에 또 늦게 들어가고 힘들까 봐 본인도 그냥 집에 들어간다며

조심히 들어가라는 그 말속에 깊은 배려가 느껴졌다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였다.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병실에서 꾹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고 그 순간, 감정의 파도가 내 마음에서 휘몰아쳤다. 작은 일에도 워낙 많은 감정을 느끼고 다른 사람 마음까지 공감하는 성향인 나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왜 이렇게 다른 사람 마음까지 다 느끼면서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감당이 안될까? 나 스스로도 너무 내가 힘들다’라고.

남편이 말했다. ‘여보의 그런 마음은 옆에서 케어만 되면 너무 좋은 마음이라고 그래서 내가 옆에 있잖아’라고. 마음에 위로가 됐다.

결혼 전에 나는 다른 사람들 얘기는 많이 들어줬지만, 정작 내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거나 내 마음을 살피는 법을 몰랐었는데 결혼 후에 남편과 살면서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그런 과정들 속에 나의 감정들을 서툴지만 조금씩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내 마음도 예전에 비해 많이 건강해졌고 여유가 생겼다.

남편이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은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얘기를 듣다가 길어지면 힘들다는 표현도 하고 적당히 끊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의 얘기만큼은 단 한 번도 끊은 적이 없고 반복한다고 뭐라 한 적도 없다.

미처 알지 못했지만, 어쩌면 나는 가장 가까이에서

내 마음을 치료받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해 한 해, 시간이 가면 갈수록 깨닫고 느끼는 게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더욱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나의 모든 순간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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